홍대 리치몬드 문 닫는 날, 제과명장의 쓸쓸한 뒷모습 보니

홍대 앞 하면 떠오르는 곳들이 있다. 미화당, 레코드포럼, 프리버드, 아티누스, 이리카페, 그리고 리치몬드. 모두 10년 넘게 홍대 앞을 지켜온 터줏대감들이다. 그런데 최근들어 즐겨 찾던, 혹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던 그런 곳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다. 자본에 밀려 갈 곳 잃은 홍대 앞 가게들. 이제 진짜 홍대 앞 문화는 홍대 앞에 없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똑같은 카페들, 똑같은 옷가게들만 즐비하다.


1983년부터 30년간 홍대 앞을 지켜온 '리치몬드 과자점'이 문을 닫는 31일, 서울에는 눈이 내렸다. 궂은 날씨에 선뜻 나서기가 망설여지던 날... 그러나 내게 리치몬드는 유년의 추억이 있는 특별한 곳이기에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결국 밤 10시가 넘은 시각, 폐점 1시간을 앞두고 리치몬드에 도착했다.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제과점은 마지막 추억을 간직하려는 사람들로 붐비는 모습이었다. 이날 리치몬드 홍대점에는 폐점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옛 단골고객부터 호기심에 들른 손님까지 평소보다 약 5배 많은 손님이 몰렸다고.


미리 구워놓은 빵과 과자를 진열하는 손길은 다름 없었다.


하지만 제과점 한켠에서는 서른살 제과점 문닫는 날을 취재하러 온 언론사들의 인터뷰가 진행되고,


다른 한편에는 대한민국 8인의 제과명장 중 한 분이자 리치몬드 제과점의 창업주인 권상범 명장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따라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태극마크가 수놓인 가운과 높은 모자.


그는 줄곧 그 자리에 앉거나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보거나 단골 손님과 인사를 나누거나,


직접 걸레를 들고 청소를 하며 30년을 지켜온 홍대 앞 리치몬드 과자점의 마지막날을 보내고 있었다. (청소하는 명장의 모습을 본 직원들이 놀라 뛰어와 걸레를 뺏어드는데... 뿌리치는 그 몸짓이 참 가슴아팠다.) 


폐점을 앞둔 명장의 쓸쓸한 뒷모습. 


1983년 현재의 건물이 완공되자마자 이 건물에 세 들었던 리치몬드 과자점은 지난해 4월 건물주로부터 계약만료일이 되면 가게를 비워달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롯데그룹 계열사와 계약했고 재계약의 여지가 없으니 나가달라는 것. 5년 전에도 파리바게트로부터 유사한 압박을 받았던 그는 제과제빵업계의 자존심과 손님들의 추억이 담긴 가게를 지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리치몬드 과자점은 성산점과 이대ECC점이 있지만 성산점은 빵공장, 이대ECC점은 학내 매점 형태라 홍대점의 의미와 역사를 담기는 어렵다. (관련 링크: http://goham20.com/1513)

매장을 둘러보니 간판 메뉴인 슈크림 빵을 비롯한 대부분의 빵은 다 팔리고, 케이크와 과자 종류가 남아 있었다. 장인 정신이 깃든 빵들. 특히 '바움쿠헨'은 모 기업이 독점하던 상표를 다시 되찾아와 제빵 업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는 히스토리를 알고나서 더욱 특별하게 보인다.


과일과 견과류가 듬뿍 든 파운드 케이크. 대부분의 빵과 과자가 달콤하고 가격이 매우 사악하지만 여느 프렌차이즈에서는 볼 수 없는 깊이있는 맛이 느껴진달까?


쇼케이스 앞에서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지는 달다구리 케이크.


자연 그대로의 재료를 얼려 만든 아이스 케이크. 유기농, 친환경, 웰빙 이런 단어가 유행하기 훨씬 전부터 리치몬드에서는 이런 고급 아이스크림을 맛볼 수 있었다.


아버지 손잡고 처음 생과일 아이스 케이크를 맛봤던 곳, 고딩 시절엔 미술학원 친구들과 빵 한쪽을 나눠 먹고, 특별한 날에는 스파게티를 먹으며 수다를 떨던 곳. 오랜만에 찾은 리치몬드에서 난 빵 몇개를 골라들었다.


어릴때 먹던 마들렌. 딸내미와 나눠 먹으며 나도 내 아이와 추억을 만들었다.


산딸기 아이스 케이크. 추웠지만 추억이 있기에 더 맛났다.


리치몬드가 있던 자리에는 엔젤리너스가 들어온다고 한다. 이 길에는 이미 커피 전문점이 넘쳐난다. 리치몬드와는 건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스타벅스가 있고, 큰 길 맞은편에는 언제 생겼는지 카페베네가 자리잡고 있더라. 대형 프렌차이즈의 홍수 속에서 홍대앞은 점점 특색없고 재미없는 곳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따라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홍대 앞 거리.


아래는 연합뉴스에 실린 글 중 일부....


"리치몬드 과자점 직원 40여명은 이날 오후 11시께 남아 있던 손님을 보낸 뒤 한자리에 모여 폐업식을 했다. 폐업을 알리는 의미로 문의 손잡이를 떼던 권상범(67) 명장도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권 명장은 "섭섭하지만 만나면 헤어지는 게 순리라 믿고 다시 빵과 함께 갈 수 있는 데까지 가고자 한다"며 "직원들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참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다. 다음 기회에 좋은 기회가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애써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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