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뒷골목으로 떠나는 세계여행

여름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참기 힘든 계절이다. 평소에는 여행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이 갑자기 베짱이 바이러스라도 걸린 듯 너도나도 놀러 나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회사들의 휴가가 몰리는 이번 주는 바캉스 피크 시즌! 일 년 내내 베짱이로 살지만, 정작 여름 성수기에는 꼼짝없이 일해야 하는 나 같은 비정규직 마감 노동자에게도 갑자기 출현한 이들이 반갑지만은 않다. 비싼 항공권이나 어디든 붐비는 휴가지 등의 부작용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연일 SNS에 올라오는 여행 사진은 보는 것만으로도 질투가 난다. 장마로 만수를 이룬 웅장한 계곡, 외국의 어느 멋진 건축물 앞에서 포즈를 취한 친구의 모습은 어제 내가 본 최고의 염장 사진. 이렇게 다른 이들의 여행이 미치도록 부러울 때, 여행 병이 도져 엉덩이가 들썩거리기 시작할 때, 하지만 당장 떠날 수 없을 때 내가 찾는 곳이 있다.


 

여행 고픈 날엔 이태원으로~!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외국인들이 오가는 이태원 거리는 여행의 고픔을 달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요즘은 서래마을같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많아졌지만, 그래도 원조는 원조만의 매력과 깊이가 있다. 근처에 주한미군 기지가 있어 외국인이 많이 살게 되고, 그래서 외국 관광객 대상의 쇼핑/관광 명소로 이름나기 시작한 이태원. 이곳에서는 그 오랜 역사를 증명하듯 다른 곳에서 접하기 어려운 다양한 이국의 문화를 만날 수 있다. 지하철 6호선 줄기를 따라 녹사평에서 이태원, 한강진역까지 '세계음식문화 거리, 로데오 거리, 꼼데가르송 거리, 앤틱 가구거리, 아프리카 거리, 이슬람 거리' 등 이름도 다양한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 소소한 즐거움, 이태원로에서 발견한 세계 인사말 부조. '나마스떼', '곤니치와' 더듬더듬 따라 하며 다음 부조는 어디에 있는지 찾아 보는 재미가 있다. 
   

입맛대로 고르는 세계 음식, 해밀턴 호텔 뒷골목


진짜 이태원은 해밀턴 호텔 뒷골목에서부터 시작된다. 이태원을 상징하는 랜드마크인 해밀턴 호텔은 요즘 핫한 수영장, 클럽 풀(Club Pool)로도 알려졌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은 호텔의 뒷골목인 세계 음식문화 거리이다. 

 

파키스탄 궁중음식점 '무굴', 널찍한 정원과 샹그리아로 유명한 지중해풍 '게코스 가든', 미국 정통 수제버거의 맛이라는 '스모키 살룬', 배우 홍석천이 운영하는 것으로 유명한 뉴욕풍 '마이 첼시', 태국풍 '마이 타이', 중국풍 '마이 차이나', 홍콩식 만두 전문점 '쟈니 덤플링', 그밖에 그리스, 브라질, 스페인 음식점 등 맛도 좋고 이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즐비하다. 
   

낮술 예찬, 이태원 프리덤



세계 요리를 맛보는 것만으로 뭔가 부족하다 싶을 때는 낮술을 한잔해도 좋다. 

낮술이라도 다 같은 낮술이 아니니까. 이곳에서라면 눈치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어디로 갈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 해밀턴 호텔 뒷골목이 시작하는 곳에서부터 아주 괜찮은 펍들을 만날 수 있다. 마치 독일의 건물 한 채를 그대로 뚝 떼어다 놓은 것 같은 프로스트(PROST)에서는 환한 햇살을 받으며 마치 유럽여행이라도 온 듯 이국적인 낮술의 낭만을 즐길 수 있다. 혹시 대낮부터 술타령이 부끄럽다면 '브런치'를 핑계 삼아 볼 수도 있겠다. 프로스트에서는 오전 11시 30분부터 3시까지 브런치, 런치 메뉴를 운영하고 있다. 물론 기나긴 리스트 속 세계 각국의 생맥주도 이때부터 주문할 수 있다.

 



진짜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조금 더 편한 분위기의 펍을 원한다면 세 골목 집(3 Alley Pub)을 추천한다. '쓰리 엘리 펍'보다는 '세 골목 집'이라는 정겨운 이름이 더 어울리는 이 집은 이 길의 터줏대감 같은 곳. 이 골목에서 가장 많은 맥주 리스트를 가지고 있고,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맥주와 음식을 먹을 수 있어 낮부터 외국인으로 북적이는 곳이다. 이곳 테라스 자리에서는 아이들과 함께인 외국인 가족도 심심치 않게 만나볼 수 있다. 외국에서 대낮의 펍이란 음식점의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캐나다 여행 중에 찾은 한 펍에서 우리 가족에게 어린이 의자와 펍의 로고를 프린트한 색칠공부 세트를 내어주어 놀랐던 기억이 있는데, 분위기만큼은 세골목 집이 그렇다.  



각자 좋아하는 것으로 한 잔씩. 부모는 맥주로, 아이는 주스나 우유로 갈증을 달랜다. 

 

 

진짜 삶이 있는 곳, 이슬람 사원 길

 
이태원역을 나와 도깨비시장 쪽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조금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트.. 트렌스바'? 한적한 길 한가운데로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 하나가 전화를 받으며 종종걸음으로 사라진다. '저 여자 좀 다른 것 같아.'라는 의심을 품을 때쯤 또다시 나타나는 트렌스젠더 클럽들. 이제 보니 '청소년 통행 금지구역'이라는 팻말이 눈에 띈다.



낮보다는 밤이 어울릴법한 거리, 어떻게 보면 현대의 서울과는 어울리지 않는 미개발 지역이지만 한편, 이 길 중간에는 마치 외국의 한인타운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펼쳐져 이색적이다. 거의 모든 한식당에서 순대국을 팔고, 버젓이 '일반 음식점' 표지를 단 곳의 간판이 우리에겐 전혀 일반스럽지 않은 아랍어라 웃음이 난다. 백화점 수입식품 코너에나 가야 겨우 구할 수 있는 동남아시아의 향신료들이 허름한 구멍가게에 진열되어 있다.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독특한 향과 함께 케밥이나 터키식 바클라바 등을 파는 이슬람 음식점들이 눈에 띈다. 심지어는 무슬림을 위한 할랄 정육점, 할랄 식품점, 이슬람 서점과 여행사도 있으니 이곳에서는 마치 내가 외국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길 끝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이슬람 사원, 한국이슬람교중앙회가 있다. 1976년에 지어진 사원은 전형적인 이슬람 형식으로 첨탑과 돔으로 구성되어 있고 첨탑 끝에는 이슬람교를 상징하는 초승달이 있다. 특유의 패턴과 곳곳에 쓰인 아랍어로 장식된 사원은 경건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곱슬곱슬한 수염을 길게 기른 사람, 터번과 히잡을 둘러 쓴 사람들이 꽤 많은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 이렇게 무슬림이 많았나 싶기도 하다. 교인이 아니더라도 내부로 들어가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짧은 반바지와 치마차림으로는 곤란하다.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는 사원 뒤편 계단에서 '이태원 계단장'이 열린다. 이태원 우사단 마을에 작업실을 가지고 있는 예술가와 카페 주인, 주민들이 지역 활성화를 위해 마련한 이 장터에서는 주로 중고의류나 직접 만든 잼, 그림엽서 등을 판다. 지난 7월이 5회째로 아직은 미숙한 모습이지만,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계단장. 8월 마지막 주에 한번 찾아가 보는 것도 좋겠다.

[이태원 여행 Tip]

* 가는 법
   - 세계음식문화거리 가는 길: 6호선 이태원역 1번 출구, 해밀턴 호텔 방향으로 나와 호텔 뒷골목
   - 이슬람 사원 가는 길: 6호선 이태원역 3번 출구, 용산 소방서 지나 오른쪽 언덕길
* 주차: 용산구청 (2013년 7월 30일부터 토, 일, 공휴일 주차 할인, 이태원 등 용산구 소재 상가에서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한 영수증을 제시하면
          최초 2시간 면제, 이후  50% 감면, 오전 7시 ~오후 10시까지, 기본요금 1,000원에 초과 5분당 25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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