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쯤 스페인] 사막에서 설산까지, 차를 몰아 그라나다로

얼마 전만 해도 며칠씩 꼴딱꼴딱 밤도 잘 새웠는데, 요즘은 하루만 못 자도 다음 날은 초저녁부터 쓰러진다. 

요 며칠 노하우나 팁 같은 원고를 반복해서 쏟아냈더니... 더 피곤한 느낌이랄까.

글 속에 내가 없는 것 같아 더 그렇다.


오늘도 나른하고 몽롱한 날씨.  

자가 치유차원에서 작년 이맘때 떠났던 스페인 여행기를 이어본다. 


▲ 깊고 푸른 발렌시아의 하늘


'오늘 운전 거리는 320km,내일은 580km를 달려 그라나다로 향할 예정이다.' 

바르셀로나에서 닷새를 보내고, 처음 작은 차를 빌려 발렌시아에 도착한 우리의 지난 여행기 마지막 문장.


▶ 관련 글: 20분 달리고, 톨비 1만 원?! 렌터카 여행의 시작, 발렌시아로


▲ 무르시아로 향하는 길


580Km라니.

내가 사는 서울 집에서 경기도에 있는 시집까지의 거리는 약 40Km, 한 시간 거리다. 

580Km라면 우리 집에서 시집까지 약 7번을 왕복할 수 있는 거리. 단순 계산으로 14시간이 걸린다.  

말이 14시간이지. 휴게소에서 쉬는 시간, 밥 먹는 시간을 합하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과연, 오늘 안에는 도착할 수 있을까?



그래도 렌터카 여행 이틀째인 우리는 신이 났다. (사진 속 현실은 뒤에서 애들이 과자 달라고 찡찡 ㅎㅎ)

150Km로 달리는 그야말로 '고속'도로도, 도심을 벗어나 처음 마주하는 스페인의 낯선 자연도, 모두 마음에 쏙 들었다.



흐드러지게 핀 노란 꽃밭을 지나,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거친 들판과 험한 산을 마주하며 달리는 경치 좋은 길.

전날 스페인 고속도로의 비싼 톨비에 된통 당한 후, '무료 도로', 즉 '국도'로 내비게이션을 설정했더니 구글맵은 이렇게 아름다운 길로 우리를 안내했다.  

종종 인적 드문 길이 나타나 뭔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듯한 기분을 느껴보기도 했다. 



그러나 선택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르는 법. 쭉 뻗은 고속도로 대신, 어떻게 이렇게 길을 닦았을까 싶은 구불구불 산길이 이어졌다.

거의 90도에 가까운 급커브 길에서도 시속 140Km를 유지하는 스페인 사람들과 함께 달리는 건, 엄청난 긴장의 연속이었다. 

물론 나는 그 스릴넘치는 순간에도 조수석에서 꾸벅꾸벅 졸았지만...^^;



표지판은 분명 시속 120Km인데, 속도에 맞춰 달리면 어김없이 경적 소리가 들렸다.

나를 깨운 건 어디선가 들려오는 경적 소리, 그리고 스티브의 감탄사였다.   



마을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알카사르가 나타났다. 

저런 절벽에 어떻게 성을 쌓았는지, 너무나 신기하고 아름다워서 호들갑을 떨며 스티브에게 몇 번이고 '잠깐만'을 외쳤다. 

곳곳에 성벽과 폐허가 된 옛 도시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내 이것도 익숙한 풍경이 되어버렸지만. 



워낙 먼 길을 가다 보니 고도와 지형에 따라 섭생이 달라지는 모습도 관찰할 수 있었다. 

발렌시아에는 오렌지 나무가 많더니, 갈수록 나무의 품종이 레몬으로 바뀌었다. 이어 드넓은 포도밭이 나타났다. 


레몬 나무라니? 레몬이 마트 비닐봉지에서 자라지는 않을 텐데, 이상하게도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레몬은 낯설었다.

치앙마이에서 바나나 나무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 터키에서 오렌지 가로수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이랄까.


I wonder how ~ I wonder why~ Yesterday you told me about the blue blue sky 

And all that I can see is just yellow lemon-tree~


어쨌든 레몬 트리를 흥얼거리게 하는 완벽한 날씨와 풍경이었다.



산길을 달려 고도가 높아 질수록 나무가 작아지고 잡초마저 짤뚱해졌다. 

사막 지형인 라스베이거스를 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191Km. 1/3 남았다.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검은 투우 소가 나타났고, 



아무 표식 없이 그랜드 캐니언 같은 절벽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미국의 유명 관광지는 분명 마케팅의 산물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누며 그야말로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만 아니었다면, 한번 내려보고 싶었다는. 



11시에 출발한 우리는 저녁 7시에 그라나다에 닿을 수 있었다. 

580Km를 고작 8시간에 달려왔다. 중간에 휴게소와 놀이방, 주유소도 몇 번씩 들르고, 밥도 먹었는데 말이다.

내가 잠깐(?)씩 조는 동안 스티브는 대체 얼마나 밟은 걸까? ==;



의심 어린 표정으로 스티브를 째려보다가 문득 저 너머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급히 정보를 찾아보니 이곳은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 산맥'. 

응? 캘리포니아의 등뼈라는 그곳?... 은 아닐 테고.


위키피디아의 설명을 보면 이렇다. (출처: 위키피디아)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에 있는 산맥이다. 스페인어로 시에라 네바다는 '눈 덮인 산'이라는 뜻이라고. "Sierra"는 자국어에서 대개 산맥을 칭하는 Montanas보다는 작은 산지대를 일컬으므로 구릉지대와 산맥의 중간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유럽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스키 시설이 지중해를 끼고 위치하고 있어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의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겨울이 아니여도 햇빛이 많고 온화해 일광욕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안성맞춤이다. 네바다 산맥과 관광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라나다 주, 말라가가 있다.



그라나다 시내가 가까워 올수록 시에라 네바다의 장엄한 풍경도 함께 다가왔다.

사전지식이 많지 않던 나로서는 그야말로 감동 자체.

 

사막에서 설산까지. 이 얼마나 다채롭고 경이로운 자연인가.

우리가 렌터카를 빌리지 않았다면, 국도를 택하지 않았다면, 가까이 경험하지 못했을 풍경.

장시간의 이동을 감내할 만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고속도로 휴게소 놀이방에서 몸을 푼 아이들의 상태도 괜찮아 보였다.



예약해둔 호텔로 가는 길에는 빨간 지붕을 얹은 지중해풍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동네'를 볼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와는 사뭇 다른, 정겨운 분위기.



알함브라 궁전 근처에 있는 호텔에 간단하게 짐을 풀고, 장도 보고 저녁도 먹을 겸 마을 중심으로 나왔다. 

9시가 다 되었는데, 그라나다는 아직 초저녁이었다. 



공원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이 보여 무작정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과 유모차가 있어 복잡한 실내 자리는 사양하고, 비교적 한적한 야외 테이블에 앉아 메뉴를 훑었다. 

이곳은 그라나다를 비롯한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3유로짜리 음료를 시키면 타파 하나가 공짜인 타파스 바였다.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장거리 주행을 완주한 남편과 고단한 하루를 잘 버텨준 아이들에게 감사하며,



오늘도 이렇게 달콤 쌉싸름하게 스페인에서의 하루를 마무리. 



집시와 플라멩코의 도시, 그라나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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