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파도키아에서 길을 잃다.

터키여행 7일, 카파도키아 3일째. 괴레메 야외박물관 관람을 생각보다 일찍 마친 우리는 카파도키아 트래킹의 백미라는 로즈밸리에 가보기로 했다. 로즈밸리는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계곡으로 석양이 비치면 암석들이 장밋빛으로 빛난다고 해서 장미계곡(Rose Valley)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보통 해 질 녘에 같은 숙소에 머무는 여행객들과 함께 삼삼오오 짝을 이뤄 가이드의 인솔에 따라 '로즈밸리 투어'로 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전날 내린 비로 계곡이 미끄러워 투어가 어렵겠다는 숙소 지기의 말에 아쉽지만 접근할 수 있는 곳만이라도 가보기로 했다.

괴레메 야외박물관을 나와 맞닥뜨린 이정표. 대체 어디로 가야 로즈벨리가 나온단 말인가... 인적드문 도로에는 이따금 거칠게 달리는 자동차만이 있을 뿐. 지도를 확인하고 일단 언덕 쪽으로 걸어보기로 했다.

한참을 걸었는데, 보이는 것은 여전히 온통 황량한 바위산뿐.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자연의 위대함이라 여겨지던 풍광들이 이제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얼마를 걸었을까... 도저히 이대로는 안되겠다싶어 지나가는 차를 잡아 히치하이크를 시도하기로 했다.

운이 좋다면 최소한 길이라도 물을 수 있겠지.

첫 번째로 선 미니버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터키 청년들이 한가득 타고 있다. 길을 묻는 동안 어찌나 쳐다보며 웃고 떠들던지... 게다가 로즈밸리가 어딘지 모르겠단다. OTL. 아쉬운 마음으로 차를 보내고 이후 몇 대의 차를 더 만났는데, 공통으로 하는 얘기가 로즈밸리로 가는 방향이 아니라는 거였다.

이미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인적없는 산 중턱에서 우리는 점점 길을 잃었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그때, 낡은 승용차 한 대가 멈췄다. 인상 좋은 할아버지 한 분이 내리시더니 유창한 영어로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는다.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다며 그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로즈밸리는 영 방향이 틀렸고, 지금 가기에는 시간이 많이 늦었다며 원하면 이곳 근처의 다른 볼거리로 우리를 안내하겠다고 한다. 내키지 않으면 숙소가 있는 괴레메로 태워다주겠다는 말과 함께. 

이렇게 반가울 수가. 살짝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우리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현지인이 소개한다는 볼거리에 욕심이 나기도 해 냉큼 차에 올라탔다.

낡은 차를 타고 윌굽으로 가는 길. 윌굽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무스타파 씨는 윌굽에 대한 자랑을 한바탕 늘어놓는다. 같은 카파도키아 사람이라도 마을마다 지역색이 강한 이들은 자신이 사는 곳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았다.

10분 정도 달렸을까. 인적 없는 산 중턱에 수도원(Monastery)이라는 낡은 이정표가 보인다. 설마 저기? 라고 생각할 무렵 차를 세우고 걷자는 무스타파씨.

포도밭을 따라 한참을 걷는다. 카파도키아에는 포도밭이 참 많다. 오랜 옛날 수도원들의 피난처였던 동굴집 근처에는 어김없이 포도밭이 있는데, 수도사들은 포도로 생계를 꾸리고, 포도주를 담가 예배를 드렸다고.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암석 교회. 절벽 중간에 있는 작은 비둘기집과 창문들이 수도원임을 말해준다. 이 수도원 앞에는 Hallaç hospital monastery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자연 그대로인 수도원 앞뜰에서 마치 비밀의 장소라도 발견한듯한 기분이 들었다. 황량한 포도밭을 지날때만해도 무스타파 씨가 그렇게 의심스러울수 없었는데, 이렇게 멋진 곳으로 안내하다니.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기도.

10~11세기에 지어졌다는 할락 수도원 내부는 놀라움 자체였다. 암석을 그대로 깎아 만든 기둥과 돔형 천장, 예수를 의미하는 부조까지. 붉은 물감으로 기하학적 무늬를 그린 초기 프레스코화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대체 이곳에는 얼마나 많은 동굴교회가 있기에 이렇게 버려진 곳마저 대단한 걸까.

기대 반, 의심 반이었던 무스타파 씨의 시크릿 투어. 생각외로 멋졌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수도원을 나서며 무스타파 씨는 새로운 제안을 한가지 했는데, 바로 포도밭이 많은 윌굽지방의 자랑인 '윌굽 와인'을 자신의 집에서 시음해보자는 것이었다... (To be continued)

[Tip] 무스타파 씨의 시크릿 플레이스, Hallaç hospital monastery
윌굽 타운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할락 밸리(Hallaç valley)에 있는 수도원으로 이곳에 숨어든 수도사들이 병원으로 사용한 첫 번째 장소라고 한다. 검색해보니 현지 여행사들의 프라이빗 투어 상품으로 남부 카파도키아를 돌아보는 코스에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윌굽 오르타히사르(Ortahisar)에 갈 계획이 있다면 굳이 가이드 없이도 가볼 수 있는 곳이라고. Nevşehir-Ürgüp road를 타고 오르타히사르로 가는 길 왼편에 이정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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