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박 28일, 아이들과 함께한 스페인 여행 스케치

스티브와 내가 결혼을 약속할 무렵, 약속한 것이 하나 있다. 

"마흔에 세계여행"


7살 큰아이는 다니는 어린이집의 맏언니가 되었다. 

4살 둘째 녀석은 이제 대소변을 가리고, 의사표현도 제법 하며 사람 구실을 한다.
남편은 샐러리맨으로서는 드물게 육아휴직을 했다.


우리는 마흔을 목전에 두고, 평소 가보고 싶었던 나라 몇 곳을 가보기로 했다.

꿈처럼 이야기하던 세계여행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가 아니라 '함께'이니까. 

아직 아이들이 어리니 너무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렇지만 노후를 담보로 현재를 택한 만큼 최선을 다해 즐겨 보기로 했다.



한달 쯤, 아이들과 스페인



1월말, 얼리버드 항공권을 예약해 스페인 여행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26박 28일이라는 기간은 꽤 여유로운 것 같았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과 포루투갈 일부까지 일정에 넣으며 희망에 부풀었으니까.

  

그러나 '두 아이와 함께'라는 단서가 붙으니 고려해야할 변수가 많아졌다.

일단 이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사람은 넷이지만, 실제 짐을 들 수 있는 사람은 두 명뿐. 게다가 둘 중 하나는 아이들까지 챙겨야 하니 이동이 많을 수록 힘이 들것이 뻔했다. 유럽여행은 기차와 저가항공으로 다니는 것이 보통이지만, 두 아이와 한 달 살림을 들고 대중교통으로 스페인에서 포루투갈까지 여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번거로움을 최소화하고, 아이들의 컨디션에 따라 유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결국 렌트카를 빌리기로 했다. 많이 아쉬웠지만, 이동거리가 긴 포루투갈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26박 28일 스페인 여행 일정


고민 끝에 주요 여행지는 바르셀로나, 그라나다, 말라가, 론다, 세비아, 톨레도, 마드리드로 선정했다. 빠예야의 원조 발렌시아, 중세 이슬람문화의 중심지 코르도바, 살바도르 달리의 고향 피게레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모티브가 된 몬세라트, 하얀마을로 유명한 프리힐리아 등에도 가보고 싶었지만 아이와 함께하기에는 이미 일정이 빠듯했다. 대신 발렌시아는 그라나다로 가는 길에 하루, 네르하는 말라가로 가는 길에 잠시, 세고비아는 마드리드에서 당일 여행으로 다녀오기로 했다. 실제로 여행을 해보니 바르셀로나에서의 첫 3일은 시차 적응기로 하루에 한 코스 정도만 돌아볼 수 있었고, 뜻하지 않게 축제를 만난 론다에서는 하루를 더 머무느라 세비야 일정이 줄었다. 아이와 함께 여행하기에 마드리드보다 바르셀로나가, 대도시보다는 동네 느낌이 나는 '말라가, 론다, 톨레도' 같은 소도시가 더 매력적이었다. 남편과 아이들은 '톨레도'같은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26박 28일간의 스페인 여행, 총 이동거리 2,840 km, 42시간 운전, 기름만 140L...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오늘은 사진 몇 장으로 한 달 스페인 가족여행을 스케치 해 본다. 



가우디의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 카사밀라, 카사바트요, 카사마카야 - 피카소 뮤지엄, 대성당, 고딕지구)



사그라다 파밀리아, 카사바트요, 카사밀라, 그리고 가우디의 철학이 담긴 수많은 건축물. 
서양화를 전공한 나는 학창시절 동경하던 가우디나 피카소, 호앙미로, 달리, 만레이 등을 직접 마주하는 것 만으로도 큰 감동이었다. 



아이들도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첨탑에서 과일을 찾아보거나, 과자로 만든 집 같은 가우디 건축물을 보며 즐거워 했다.
여행 초반에는 이상 기온으로 날이 많이 쌀쌀해서 옷을 두껍게 입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하루에 한 코스씩만 다녔다.



알함브라의 도시, 그라나다 (알함브라, 아랍거리, 대성당, 황실 예배당, 동굴 플라멩코, 알바이신)



어디선가 기타연주가 들려올 것만 같은 알함브라 궁전. 렌트카를 빌린 후 도착한 첫 여행지라 기억에 많이 남는다. 피크타임 입장권은 일찌감치 온라인 예약이 끝나서 스티브가 당일 입장권을 구하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야 했지만, 덕분에 오전 표를 구해 궁전 내부를 둘러본 후 정원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라나다는 집시들이 생활하던 동굴을 그대로 공연장으로 만든 '동굴 플라멩코' 공연으로 유명하다. 거리에서 즉흥적으로 예약한 곳이 뜻밖에 가장 유명한 공연장이라, 게다가 알바이신지구 나이트 투어까지 포함되어 있어 아이들과의 여행에서는 꿈도 못 꿀 알함브라 궁전의 야경까지 볼 수 있었다.



진아는 즉석 거리공연의 주인공이 되는 뜻밖의 경험을 하기도 했다. 한국식 막춤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유럽의 발코니, 네르하



말라가로 향하는 길에 들른 하얀 마을. 아름다운 지중해를 볼 수 있어 '유럽의 발코니'라 불리는 네르하에는 진짜 아치형 발코니가 있다. 



기대와 달리 날이 아직 쌀쌀해 지중해를 마음껏 즐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물을 좋아하는 아이는 신이 났다.



스페인 최고의 휴양지, 말라가 (말라게타 해변, 히브랄파로, 피카소 생가, 대성당, 구시가지) 



코스타 델 솔(태양의 해변)의 시작점이자 스페인의 대표적인 휴양지인 말라가 역시 그늘에 들어가면 긴팔 옷을 꺼내입어야 할 정도였다. 



원래는 말라가에서 며칠간 해변에서 뒹굴거리 예정이었지만, 이상기온으로 피카소 생가와 예정에 없던 히브랄파로 등 말라가의 주요 명소를 다녀왔다. 대부분 좋았고, 특히 히브랄 파로의 성벽길을 걸었던 것은 이번 스페인 여행중 가장 멋진 경험 중 하나로 기억에 남는다.



소박한 정취의 소도시, 론다 (누에보 다리, 아랍 목욕탕, 론다 로만티카)



해발 750m의 절벽도시 론다, 마치 동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옛 집들이 모여 자연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랜드마크인 누에보 다리를 바로 코앞에서 볼 수 있는 파라도르(스페인 고성을 개축해 만든 호텔)에 묵어보기도 했다. 


론다에서는 뜻하지 않게 '론다 로만티카'라는 축제를 만났다. 마침 우리가 떠나는 날에 축제의 하일라이트인 퍼레이드가 열린다고 해서, 세비아 일정을 미루고 밤 늦게까지 축제를 즐겼다. 축제는 생각보다 규모가 훨씬 컸고, 마을 주민 전체가 참여해 즐기는 진짜 마을 잔치였다. 이날 정말 아름다운 스페인 '세뇨리따'도 많이 만날 수 있었는데, 오늘은 일단 한 분만 공개를... ^^

 


화려함의 끝, 세비야 (대성당, 스페인 광장)



말라가, 론다 같은 소도시에 며칠 머물다가 갑자기 대도시인 세비야로 나오니 좀 무섭고, 낯설었다. 밤늦게 도착해 일정이 하루 반나절 밖에 없어 대성당과 스페인 광장만 돌아봤는데, 어마어마한 규모에 섬세하게 건축되고 조각되고 그려진 건물, 다리 등은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진아의 세비아 즐기는 법. :)



중세시대 골목을 따라서, 톨레도 (타호강, 소코도베르 광장, 구시가지, 알카사르) 



돈키호테로 유명한 카스티야 라만차 지방의 주도인 톨레도는 미로처럼 얽힌 골목에서부터 짙은 이슬람색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아직도 중세시대의 집과 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그저 좁은 골목을 걷는 것만으로도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는 곳. 단, 차가 있다면 반드시 외곽 주차장에 세우기를 권한다. 


중세유적을 에둘러 흐르는 타호강을 끼고 걷는 길, 소코트렌이라는 작은 기차를 타고 한바퀴 돌 수도 있다.



정균이에게 이곳은 달팽이가 많아 즐거운 곳~



미술관 기행,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피아 미술관, 솔광장, 마요르 광장, 산미구엘 시장)



아이들에게는 지루할 수 있는 미술관 여행. 나름의 묘책으로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진아와 함께 '미술관에서 만난 스페인 공주'라는 책을 읽으며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있는 프라도 미술관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그 때문인지 진아는 그림 속 마르가리타 공주를 찾아 보고 또 봤다. 이제 막 조잘조잘 말을 하게 된 네 살 정균이도 소피아 미술관에 전시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면서도 나름의 해석과 감상평을 늘어 놓았다. 아이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순간. 뭐든 섣불리 판단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됐다.    



그림을 본 후 부터 진아가 그리는 공주 스타일. ㅎㅎ 붙이는 이름도 스페인풍이다.



마요르 광장에서는 뜻하지 않게 진아의 옷과 비슷한 천을 두르고 행위예술을 하는 작가를 만나 기념 사진을 남겼다. ㅎ



백설공주 성이 있는, 세고비아 (수도교, 세고비아성)



마드리드에서 당일치기 여행으로 다녀온 세고비아, 차가 있으니 이럴 때 참 좋다. 수도교는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웅장했다. 



수도교의 도시로만 알고있었던 세고비아. (기타랑은 전혀 상관 없단다. ㅎ) 직접 가보니 마을 전체가 테라코타 사암으로 이루어져 골목골목 걷는 재미가 있었다. 기념품점에서 파는 토기나 자기 등은 몽땅 사오고 싶을 정도로 예뻤고... 진아는 백설공주 성의 모티브라는 세고비아 성 내부에 관심이 많았다. 아마 꽃할배의 영향인듯 한데, 방송 촬영분 외의 장소들이 더 볼거리가 많아 깜짝 놀랐다. 



또 다른, 바르셀로나 (몬주익성, 몬주익 분수쇼, 카탈루냐 음악당, 4GATS)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아이들이 소원하던 곤돌라를 탔다. 아이들에게 곤돌라는 이동수단이 아닌 자체가 놀이이자 목적. 별 기대 없이 탔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바르셀로나의 전경이 펼쳐질 줄이야...!



몬주익 분수쇼는 마치 거대한 불꽃이 끊임없이 터지는 것 같았다. 예술의 전당 음악분수나 라스베가스의 분수쇼를 상상하던 나는 분수로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함에 놀라고, 스케일과 예술적인 표현에 또 놀랐다. 'Show'라기보다는 'Magic Fountain'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렸다.   



여행을 시작할 무렵 피카소 미술관을 다녀온 내가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던 것을 기억한 스티브가 안내 한 곳, 바로 바르셀로나 모더니즘의 중심이었던 '콰트로 갓츠(4 GATS)'다. 피카소가 자주 들렀던 바에서 단돈 3유로에 맥주 한 잔을 기울이며 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니.. 이건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보는 것 이상으로 좋았다. 

 

스페인 문화 유산의 많은 부분은 약탈의 역사에서 비롯됐지만, 발길 닿는 곳마다 마주하게 되는 대단한 유적과, 거장의 작품, 옛것 그대로 보존된 거리 등은 말 그대로 축복이다. 때로는 화려함과 웅장함에 놀라고, 때로는 그 배경에 화가 났지만, 어쨌든 내 생에 이런 대단함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던 한달이었다. 왜 사람들이 유럽여행을 떠나려고 하는지, 다녀온 사람들이 다시 가고 싶어 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던 여행. 아이들과 함께라 놓친 것도, 아쉬운 점도 많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추억과 에피소드를 남겼으니, 그 이야기는 앞으로 매일 조금씩 풀어 보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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