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쯤 스페인] 바르셀로나 구시가지 탐방 - 고딕, 보른지구

이제 와 스페인 한 달 여행을 하루 단위로 기록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했다. 옆길로 잘 새는 내 성격상 여행기를 시작해도 끝내지 못할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남기지 않으면 사진 폴더 한번 열어보지 않고 소중했던 순간을 잊을 것 같아, 아직 기억이 생생할 때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아마 앞으로의 여행기는 가끔 이렇게 시간순으로 흘러갈 것 같다. 


28일 여행 중 서울을 떠난 지 나흘째, 제대로 바르셀로나를 둘러보기 시작한 이틀째 되는 날의 이야기이다.


▲ 리쎄우(Liceu)역이 있는 람블라스 거리 풍경. 한가운데 울창하게 우거진 가로수 숲이 독특하다. 선과 도형, 원색으로 구성된 20세기 초현실주의 회화로 유명한 후안 미로의 타일 작품이 바닥에 있다.


볼 것 많은 바르셀로나에서 구시가지 여행은 보통 하루 코스로 본다. 람블라 거리에서 시작해 중세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고딕 지구와 보른 지구를 걸어서 보고, 시간이 남으면 피카소 미술관과 시우다데아 공원, 카탈루냐 음악당까지 돌아보는 것이 일반적인 동선이다. 가이드북에서 추천하는 일정은 고딕 지구에서 대성당, 왕의 광장, 산 하우메 광장, 페란 거리, 아비뇨 거리 등을 본 후, 최근 수년간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부티크와 잡화점, 레스토랑 등이 들어서 주목받는 지역이 된 보른 지구로 건너가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골목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역사를 알고 싶다면 여행사의 '고딕 지구 워킹투어'같은 일일투어 상품을 예약하는 것도 좋다고 했다. 사실 나는 투어 상품이 욕심났지만, 아직 시차도 적응 못 한 아이와 함께 일정 빠듯한 투어를 따라다니는 건 버거울 것이 분명했다. 결국, 마음을 비우고 가이드북과 유모차만 챙겨 들고 나섰다. '갈 수 있는 데까지만 가보자~!' 라는 심정으로.



숙소가 있던 그라시아 거리(Passeig de Gràcia)에서 람블라스 거리(La Rambla)까지는 지하철을 이용했다. 사실 2Km 남짓한 거리로 걸어서도 갈 수 있었지만, 아이들이 미리 지칠 것 같아 걷는 거리를 최소화했다. 이른 아침의 람블라스 거리에는 벌써 꽤 많은 관광객이 있었다. 소매치기가 많아서인지 경찰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 19세기에 지어진 아름다운 우산가게, 까사 브루노 쿠아드로스


역에서 내리자마자 시선을 사로잡은 건물 하나. 일본식 우산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건축물이었다. 아름다움에 취해 한참을 쳐다보다가 '우산 가게 아니야?'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는데, 알고보니 19세기에 우산 가게로 쓰였던 건물이란다. 사 브루노 쿠아드로스(Casa Bruno Cuadros/1883년)라는 이름을 가진 이 건물은 현재 은행으로 쓰이고 있다고 했다.



구시가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고딕지구. 이곳에서는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을 걸으며 직접 보고 느껴야 한다고 해서 좀 걸어보기로 했다. 일요일이라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 좁은 골목길 사이로 숨바꼭질하듯 나타나는 작은 상점들을 기대했으나 보이는 건 폐허가 된듯한 옛 도시였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문을 연 가게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그래피티가 난무하는 철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인적드문 골목에 걸인이라도 나타나면 걸음이 빨라졌다. 


▲ 페란 거리 (Camer De Ferran)

 

▲ 시청사가 있는 산 하우메 광장 (Pl. Sant Jaume)


▲ (왼쪽) 고딕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인 BISBE 골목, (오른쪽) 진아가 원해 시청사의 경찰과 사진을 찍어줬다. 흔쾌히 손을 내밀어준 인상 좋은 아저씨께 감사를~!

 

그러나 고딕지구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매력적인 곳이었다. 골목을 헤메다가 돌아 나오면 광장이고, 광장을 지나면 또 다른 골목으로 이어졌다. 중세 시대부터의 수 많은 사연이 남아있을 이 골목과 광장에 우리도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걷다가 마주한 고딕지구의 놀이터 풍경. 목마 몇 개와 미끄럼틀 등이 전부였다. 아마 스페인에서 본 놀이터 중 가장 소박한 곳일 거다. 그래도 지루했던 진아는 잠시나마 신나게 뛰어 놀었다. 벤치에 앉아 진아를 지켜보던 나는 문득 바르셀로나가 참 '살기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며칠 안됐지만, 가본 곳 어디라도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놀이터가 있었다. 우리처럼 아파트 단지 아이들만을 위한 놀이터가 아니라 누구라도 들어가 놀 수 있는 곳이었다. 공공자전거도 자주 눈에 띄었다. 목이 마를 때는 공공 수도에서 목을 축일 수 있었고, 다리가 아프면 의자에 앉으면 됐다. 쓰레기통도 무척 흔했다. 바르셀로나는 사람을 배려하는 도시였다. 


▲ 피카소의 스케치가 있던 고딕지구 인포메이션 센터



▲ 카테드랄 앞 광장에서 열린 골동품 시장.


큰 광장과 길이 나타났고, 관광객도 점점 많아졌다. 대성당, 카테드랄 앞이었다. 마침 골동품 시장이 열리고 있어 잠시 둘러봤다. 성물에서부터 옛 지도, 도자기, 카메라 등 다양한 골동품이 판매되고 있었다. 거래가 활발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진아가 관심을 보였던 건 신발을 만들던 목각 틀과 오래된 열쇠였다. 사달라고 조르기도...;

▲ 바르셀로나 대성당 (카테드랄)


드디어 바르셀로나 고딕지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성당에 다다랐다. 이곳은 바르셀로나의 수호성인인 산타 에울랄리아를 모시는 성당으로 1298년 착공된 뒤 완성되기까지 150여 년이 걸렸다고 한다. 평일 오후 1~5시, 일/공휴일 오후 2~5시까지만 유료이고 나머지 시간에는 무료 입장이 가능해 아침에 도착한 우리는 무료 관람이 가능했다. 시차 부적응의 덕을 봤달까?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다운 성당. 과거 스페인의, 카탈루냐의 힘을 보는 것 같았다. 마침 일요 미사가 집전되고 있어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짜 성당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카테드랄 앞 광장에서 사르다나를 추는 사람들


내부 구경을 마치고 나오니 12시 무렵, 사람들이 대성당 앞에 빼곡히 모여 있었다. '사르다나' 춤판이 벌어진 것이었다. 매주 주말 오후가 되면 바르셀로나 공원과 대성당 앞에서 '사르다나'라고 하는 민속 춤 공연이 펼쳐진다. 이 춤은 계속되는 침략과 억압을 견뎌낸 카탈루냐 사람들의 단결된 정신을 의미한다고. 



가만보니 어딘가 익숙하다. 손 잡고 음악에 맞춰 흥겹게 빙빙 도는 춤?! 강강 술래 아닌가?

달도 없는 훤한 대낮이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손잡고 스페인 음악에 맞춰 한국식 강강 술래를 춰봤다.

  

▲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


점심을 대충 떼우고 보른지구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으로 향했다.   



아.. 어마어마하게 긴 줄이 늘어서 있는 피카소 미술관 앞. 입장객 제한으로 평소에도 줄을 선다던데, 일요일 무료 입장이 가능해서인지 이날은 정말 줄이 길었다. 포기하고 그냥 돌아갈까? 생각하던 차에 스태프 한 명이 우리 앞을 지나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얼마나 기다려야 하냐?' 물었더니 유아 동반 입장객은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며 따라오라고 했다. ㅠ.ㅠ 이렇게 고마울 데가...


아이를 이용해서는 안되겠지만, 이 긴 줄을 아이와 함께 서서 기다리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아이를 안고 어르고 잡으러 뛰어 다니고 훈계하며 기다리다가는 입장도 하기 전에 아이도, 스티브와 나도 지쳐 쓰러질 것이 분명했으니까. (이미 새벽부터 시작한 도보여행으로 피곤하기도 했고...)  



피카소의 어린시절부터 일생 전반에 걸친 작품들이 시대적인 설명과 함께 전시된 이 미술관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비록 아비뇽의 처녀들이나 게르니카 같은 익숙한 작품들은 없었지만, 여러가지 호기심을 보이는 진아에게 내가 아는 작은 지식들을 모아서 이야기 해 줄 수 있어 행복하기도 했다. 


▲ 피카소 미술관 기념품 판매소로 돌진하는 둘째군. ㅠㅠ


대성당을 구경할 때 까지만 해도 비몽사몽 유모차에서 꼼짝을 못하던 둘째녀석은 미술관에서 체력을 회복했다. 수도원을 개조해 만든 이 엄숙한 미술관에서 어찌나 뛰어다니던지... ㅠㅠ 덕분에 스티브와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번갈아 관람을 해야 했다.  


▲ 중세 시대의 정취가 풍기는 보른지구 거리 풍경


▲ 레이알 광장(Pl. Reial)


오후의 레이알 광장(Pl. Reial)은 비둘기들의 안식처였다. 가우디의 초기작품인 가로등을 볼 수 있다기에 찾았던 곳.


▲ 소매치기 걸인을 만났던 곳. 


그리고 우리는 소매치기를 만났다. 위 사진 속 대로변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중년의 집시 걸인이 적선을 요구하며 유모차를 밀고가는 남편에게 다가와 점퍼 주머니를 뒤졌다. 몇 번 뿌리친 후에도 계속 따라다니며 위협하는 모습이 너무 대범하고 황당했다. 100m는 족히 쫓아왔던 것 같다. 이렇게 대 놓고 소매를 터는 것이 이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하는데, 놀란 우리는 이후 걸인만 보면 슬금슬금 피하게 됐다. 


"멋있지만 재미 없어~!" 

바르셀로나의 구시가지 탐방을 마치고 난 후 진아가 내뱉은 말이다. 


스티브와 나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비단 아이에게만 그랬을까?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걸 봤다. 그 역사와 숨은 의미를 낱낱이 기억하지 못하면 어른에게도 마찬가지 느낌일 것이다. 게다가 이 거리는 이제 너무 닳고 닳은 느낌이다. 중세시대의 거리와 찬란했던 역사는 그대로 남아있지만, 잇속만 밝히는 상인, 집시, 소매치기 때문에 빛이 바래고 있다. 두 손으로는 가방을 움켜잡고, 도둑질을 당할까봐 두려움에 떨며 둘러보는 거리가 과연 아름다울 수 있을까? 스페인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종차별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내게도 람블라스 거리와 고딕지구는... 두서없이 포스팅 한 이 긴 글 처럼, 괜한 의무감에 조금은 억지스럽게, 열심히 둘러봤던 곳이었다. 다시 바르셀로나에 간다면, 여유로운 마음을 가진다면,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사진을 정리하고, 포스팅을 하기 위해 다시 자료를 찾다 보니 청년의 피카소가 예술적 열정을 불태우던 몬시오 골목과 아비뇽길, 몬따까다길, 보헤미안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는 라발 지구의 골목들은 아예 시도도 못해본 것이 아쉽다. 그래도 아이들과 함께 반나절 이상 도보로 여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봤으니, 기대 이상의 성과(?)가 있었던 하루였다. 하지만, 앞으로 당분간은 서로를 위해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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