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잘못들어 만난 감동적인 캐나다의 가을풍경, 버밀리온 호수 (Vermilion Lakes)

버밀리온 (Vermilion).
서양화를 전공한 내가 호수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떠올린 것은 수채화 물감이었다.
갓 짰을 때는 짙은 붉은색이지만 물을 섞으면 섞을수록 노란 기운이 퍼지는 두 얼굴의 색깔.
버밀리온을 우리말로 하면 '다홍'색인데, 처녀를 상징하는 수줍은 붉은색을 의미하기도 한다.



붉은 호수라니. 

해 질 녘 석양에 물든 로키 산과 호수에 비친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버밀리온'이란 이름이 붙었단다.

로키를 설명하는 많은 가이드북에서 동틀 무렵이나 해 질 녘에 찾으라고 하는 것 보니
버밀리온 레이크의 진짜 모습은 '붉은빛'을 받아야 드러나나 보다.

하지만 일부러 일몰 시간까지 기다리기에는 캐나다 로키에 볼 것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오늘은 예상치 못한 변수로 오전 일정이 지체되어 해 지기 전에 서둘러 다음 목적지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



아쉽긴 하지만 석양에 물든 버밀리온 레이크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보우밸리 파크웨이를 타고 레이크루이스까지 가기로 한다.

운전을 맡은 스티브는 '가는 길에 버밀리온 호수가 있으니 차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밴프 타운을 벗어나서 얼마나 달렸을까? 채 5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좁다란 오솔길이 나타난다.


우리가 달리는(이때까지만 해도 달리고 있는줄 알았던) 보우밸리 파크웨이(Bow Valley Parkway)는 캐나다 로키를 관통하는 고속도로인 트랜스 캐나다 하이웨이(Trans Canada Highway)가 개통되기 전에 다니던 길이다. 보우강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보는 거대한 산들을 감상할 수 있고, 가는 길에 트래킹 코스로 유명한 존스톤 협곡을 들를 수 있기에 많은 관광객이 밴프에서 레이크루이스까지 보우밸리 파크웨이를 따라 달린다.


그런데 아무리 옛길이라고 해도 1차선 외길은 좀 너무한 것 아닌가?

몸집 큰 캠핑카라도 한 대 서있으면 아슬아슬 한 상황.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하면서도 시선은 자꾸만 아름다운 호수로 향했다.


"여기가 버밀리온 레이크 아니야?"


어차피 잘못 들어선 길이라면 경치라도 구경하고 가자며 차를 세웠다.



"와~!"


외마디 탄성 외에는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풍경. 뜻밖의 황홀한 아름다움에 할 말을 잃었다.


이제껏 보아왔던 로키의 푸른 호수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캠핑카에서 보는 경치가 궁금해 가까이 가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호수인지 습지인지 물이 빠져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곳에는 듬성듬성 자란 수초가 짙은 노란 빛으로 물들어 황금 들판을 연상케 했고, 그 너머로는 런들 산(Mt. Rundle)이 장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어느새 가을빛으로 물든 로키의 모습이 잔잔한 호수에 비쳐 두 배로 멋진 풍경을 만들어 냈다.

해 질 녘엔 여기에 붉은 노을까지 함께 할 것을 생각하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 올랐다.

아름다운 호수의 정취에 매료되어 그대로 이곳에 머물고만 싶었다.



버밀리온 호수는 3개의 호수가 연이어져 있는데 이 호수들을 통틀어 버밀리온 레이크(Vermilion Lakes)라고 부른다. 

보우강과 연결되는 호수는 밴프 다운타운에서 카누를 타고 개울을 따라 둘러볼 수도 있고, 산책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기에도 좋다고.
캐나다 로키는 야생동물을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이곳에서는 특히 대머리 독수리와 엘크, 코요테와 물새를 관찰할 수 있다.



작은 호수라 바람이 부는 날에도 비교적 잔잔한 수면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선명한 반영을 볼 수 있었다. 거울처럼 선명한 반영은 이곳을 더욱 신비롭게 한다.

마치 로키산맥 한편에 숨겨좋은 비밀의 정원같이 아름다운 풍경.





일몰 시각까지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북반구라 해가 늦게 져 저녁 8시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결국 다시 차를 돌려 보우밸리 파크웨이로 향하는 길. 아까는 보이지 않던 캠핑카 한대가 어느새 경치 좋은 곳을 차지했다.



길을 잘못 들어 예정에 없던 버밀리온 호수까지 들르는 통에 또 한 시간이 지체되었다.
하지만 덕분에 캐나다의 가을 정취를 만끽했으니 이런 것이 또 렌터카 여행의 묘미가 아닌가 싶다.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뜻밖의 즐거움을 주는 캐나다 로키 여행. 오직 자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장엄한 아름다움이 있기에 더욱 감동적이다.


* 이 글은 SKT 기업블로그에 기고한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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