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 여행 떠나기 하루 전날의 일상
- 라이프 로그
- 2013. 4. 30. 01:42
여행이나 출장을 떠나기 하루 전날, 사람들은 어떤 하루를 살까?
분주하게 짐을 싸고, 마지막으로 필요한 물건들을 사들이고, 여권과 항공권을 꼼꼼히 찔러 넣고...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엄마가 되기 전까지는.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가 아닌 혼자 떠나는 장거리 여행.
설레는 마음이 가장 크지만 마냥 즐거워만 할 수는 없다. 아이들 때문이다.
오죽하면 '엄마들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곰국'을 끓인다'는 우스갯 소리가 있을까?
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여행을 떠나는 엄마가 냉장고에 마련해 놓은 음식은 손도 대지 않고
매일 라면이나 정크푸드로 끼니를 때웠던 것 같은데, 막상 입장이 바뀌고 보니 나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더라.
8일간의 미국 서부 여행. 요세미티와 그랜드 캐년 등 '죽기전에 꼭 봐야만 한다'는 세계 최고의 국립공원들.
그랜드 캐년의 속살까지 파고들어 캠핑으로 즐기는 대자연은 분명 새로울 것이고, 대단한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내가 긴 여행을 떠나 새로움을 만끽할 즈음, 아이들은 엄마 없는 생경한 하루하루에 새롭게 적응을 해야 할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하루 전날, 나는 곰국을 끓이는 엄마의 심정으로 아래와 같은 일들을 했다.
- 일주일이면 길게 자라나는 아이들의 손톱을 깎아줬다.
- 눈썹에 닿을듯 말듯 한 두 아이의 앞머리를 살짝 잘라 주었다.
- 두유와 과자 등 일주일간 먹을 아이들의 간식거리와 스티브가 비상시 챙겨먹을 수 있는 간편식품을 사두었다.
- 속옷부터 양말까지 매일 입을 옷을 꺼내 날짜별로 봉지봉지 넣어 두었다.
- 할머니 댁에 갈 때 쓸 물티슈와 기저귀 가방을 따로 챙겨두었다.
- 아이들의 선생님께 빠지는 날, 등 하원 지도는 누가 하는지 등의 편지를 쓰고, 구두로도 전했다.
- 매일 무엇을 챙겨야 하는지, 무엇을 먹여야 하는지 스티브에게 편지를 썼다.
- 불고기를 재우고, 오징어 완자를 만들고, 냉장고 청소를 했다.
그리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정작 내 짐을 쌀 기운이 없어 에스프레소 더블샷을 진하게 만들어 마시고
카페인 충만한 가운데 하나씩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비록 새로 산 침낭이 트렁크를 한가득 차지해 다시 가방부터 다시 찾아와야 했고,
짐을 꾸리다보니 진짜 아이들을 놓고 떠나는 것이 실감나 뭔가 더 챙겨 놓아야 할 것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몇시간 후면 그런 걱정도 놓아두고 나는 떠날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요세미티, 라스베가스, 그랜드캐년, 데스벨리, 그리고 산타바바라로...
그리고 여행기간 동안은 잠시 현실을 잊고, 보는 그대로를 느껴보리라.
그것이 자연에 대한, 여행에 대한 예의니까.
생각해보니 '엄마의 곰국'은 남겨진 가족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애써 보듬으려는 일종의 '의식'인것 같다.
자기 위안이랄까... 경험 후에야 깨닫는 사실.
어쨌거나
Bon Voyage to me ~!
* 이번 여행을 위해 쿨하게 아이들을 케어해 주시겠다고 해주신 양가 부모님과 누구보다 큰 부담을 안게 될 스티브,
그리고 '무섭지만 괜찮다'며 의젓한 모습을 보여준 딸아이에게 감사한다.
엄마의 여행은 이토록 큰 희생을 동반하지만, 그러기에 더 알차고 즐겁게 보내야만 할 의무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 마지막으로 여행을 제안하고, 취재를 지원해 준 '하나투어'에 감사한다.
▲ 여행을 준비하며 새로 산 미국 서부 국립공원 안내서 + 트렁크를 꽉 채운 동계형 침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