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필름에 담긴 사진들 - 로모를 보내며...

필름이 감기지 않는다. 셔터도, 조리개도,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모든 것이 한데 엉겨붙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정말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유채꽃밭에서의 스티브

집 앞 공원, 만개한 벚꽃. 

로모(LOMO LC-A)를 처음 만난 건 2001년 4월이었다. 첫 직장에서 받은 첫 월급으로 산 내 첫 선물. 무뎌진 감각을 자극하는 독특한 감성의 사진도 좋았지만 구소련에서 사용하던 스파이 카메라였다는 믿거나 말거나 스토리가 마음에 들었다. 피사체에 초점이 잘 맞는, 날씨에 따라 뿌연 흔적만을 볼 수 있는 이 장난감 같은 카메라로 어떻게 스파이 활동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가끔은 놀랄 만큼 생동감 있는 사진이 찍히기도 했다. 스물 몇 장의 사진을 버려도. 무뎌진 감성을 자극하는 몇 장의 사진을 보고 기대감에 다시 다른 필름을 끼워 넣게 되는... 로모는 그런 마약과도 같은 매력이 있었다.

병아리 같은 진아. 봄 햇살을 맞으며... 

홍대 프리마켓의 느린 오후

이후 나는 'Don't Think, Just Shoot'이라는 로모의 모토에 따라 참 열심히 나의 주변을 스파잉했던것 같다. 예측할 수 없는 결과물들을 즐기며...

로모그래퍼의 10가지 골든 룰

1. 어디든 가지고 가라,  2. 밤낮 구분 없이 찍어라, 3.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라, 4. 엉덩이 높이에서 찍어봐라, 5. 가능한 피사체에 가까이 가라, 6. 무엇을 찍을 것인지 생각하지 마라, 7. 빠르게! 8. 필름에 무엇이 담겼는지 알려고 하지 마라, 9. 인화하고 난 다음에도 알 필요 없다. 10. 그 어느 룰에도 신경 쓰지 마라.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그런데 이 카메라. 참 고장이 잦다. 아무리 보증서 한장 없는 토이카메라라지만 공식 A/S센터도 없고, 사설 업체에서 수리 한번 했다하면 5~10만 원을 훌쩍 넘기니. 그간 수리비로 들어간 돈을 합하면 아마 카메라 한 대를 더 사고도 남을 것 같다.

푸켓 카이섬

특히 바다. 일반 카메라에도 바다의 염분은 독이거늘... 짠기가 닿으면 바로 녹이 슬어버리는 로모는 지난 여름 태국에서의 추억만을 남기고 녹아버렸다. 벌써 지난 몇 년간의 바닷가 출사로 수차례 녹 제거를 한 후라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예견된 고장. 가져가지 말았어야 했을까?...  


햇빛이 좋은 날에 얻을 수 있는 로모만의 자연스러운 터널 이펙트. 모래 묻은 아이의 다리와 반짝반짝 빛나는 촘촘한 발가락. 해변에서만 얻을 수 있는 로모만의 결과물이 있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사진 몇 장으로 위안을 삼는다. 
 

방콕, 카오산 로드

마지막 필름 속 마지막 사진은 지난여름의 뜨거운 카오산거리 한복판에 멈춰 있다.
지금 내 마음이 그런것처럼.... 

(* 마지막 두 통의 필름 속에 든 위 사진은 모두 로모 LC-A와 후지 리얼라 필름으로 찍었습니다.) 


터키 사프란 볼루의 흐드를륵 언덕

즐겨 사용하는 필름인 후지 리얼라가 단종되었다. 코닥의 포트라 시리즈도 곧 단종 예정이란다. 필름 현상소는 이제 대학가나 충무로나 가야 찾아볼 수 있다. 코닥은 이제 더이상 아날로그 필름회사가 아닌 디지털 회사임을 표방한다. 진정 필름 카메라의 시대는 간 것일까? 아날로그 감성을 쫓는 몇몇 마니아만의 욕심일까? 새 로모를 알아보다가 접한 이런저런 소식에 우울해지는 하루다.

[로모로 찍은 사진이 있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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