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신 날 수가! 하이서울페스티벌, 차 없는 거리에서 보낸 하루

"식탁을 좀 보러가야겠어!"


아침밥을 먹으며 진지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오래된 식탁을 바꿔야겠다고 마음 먹은지 몇 달째, 그동안 인터넷으로 찾아본 제품을 가족과 함께 보러 갈 생각이었다. 

여행 외에는 소비에 인색한 내가 가구를 바꿔야겠다고 마음 먹은 건, 도저히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구멍이 난 소파는 버리면 됐지만, 식탁은 그럴 수 없으니까.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다가 결국 바꾸기로 결심한 거다. 


"오늘은 안돼."

짧고 단호한 남편의 한 마디.

뭐 중요한 일이라도 있나? 

매정하게 자르는 그가 야속해지려는 찰나. 


"광화문 앞이 오늘 차 없는 거리래. 하이서울페스티벌 마지막날이잖아. 

퍼레이드도 하고 재밌을 것 같던데?"


▲ 하이서울페스티벌 2015 포스처 (출처: 하이서울페스티벌 홈페이지 http://www.hiseoulfest.org/2015)


더 이상의 말을 잇지 못하고, 바로 마음이 돌아선 나.

이런 걸 두고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하는 걸까? --;


결국 식탁 따위는 까맣게 잊고, 간단히 삼각 김밥 몇 개를 만들어 거리로 나섰다. 


오늘은 차 없이 여행하는 날. 

오랜만에 지하철에 오른 아이들은 소풍날처럼 신이 났다.




하이서울페스티벌은 2003년에 시작된 서울의 대표 축제다. 

2013년 부터 거리예술축제로 발전해 매년 가을 서울시민과 관광객이 함께 즐기는 놀이판이 벌어지고 있다. 

올해 '하이서울페스티벌 2015'는 '길에서 놀자'라는 슬로건을 걸고 10월 1일~4일까지 나흘간 시민청, 광화문광장, 청계광장, 서울역, 세종대로, 덕수궁길, 서울시립미술관 등 서울 거리 곳곳에서 열렸다. 


특히 마지막 날인 오늘(4일)은 하룻동안 서울광장 앞 도로를 통제하고 각종 거리공연과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차 대신 사람들로 북적이는 광화문 대로에서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춤추고 놀이하며 즐거웠다.

오늘 서울광장 주변은 거대한 홍대 앞 놀이터 같았다.



모이면 놀이시작! 노는 대로


작은 우유곽 하나로 튼튼한 양면 딱지를 만들 수 있다. 온 가족이 딱지를 만들어 길 위에서 한 판 대결을~! 


'대로 한 가운데 이렇게 서있어도 되나?' 횡단보도에 빨간 불이 켜질 때 마다 불안했다.

하지만 오늘은 세종대로에 차 없는 날~!


차가 멈춘 거리에는 '끝장대로'라는 제목 아래 '노는 대로(추억놀이터/ 구름놀이터/ 분필놀이터), 움직이는 대로(시민 퍼레이드), 그 대로(거리공연)'라는 폐막 프로그램이 열렸다. 아이와 함께한 우리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노는 대로'. 우유곽으로 딱지를 접어 딱지를 치거나 분필로 도로에 낙서를 하는 등 크게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거리에서 놀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었다.


▲ 김해 봉황초등학교 4-6학년, 한울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들이 스스로 만든 바닥놀이

내가 가장 인상깊게 본 거리놀이는 '놀이터를 지켜라 + 바닥놀이 프로젝트: "모이면, 놀이시작!"'이다.
원래는 아이들 스스로 놀이와 놀이공간을 만들고 놀 권리를 찾아가는 '바닥놀이'를 알리는 것이 취지인 것 같은데. 2015년 1월, '어린이 놀이시설 안전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전국의 놀이터가 동시다발적으로 이용금지, 철거 되어 놀 곳이 없어진 아이들의 놀이공간을 이렇게라도 되찾아 주려는 노력 같아 먹먹한 가슴으로 한 참을 보고 함께 놀았더랬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도 작년 가을 놀이터가 철거됐다. 한 달 집을 떠나있다가 돌아와보니 갑자기 놀이터가 없어졌다. 아이 없는 세대가 더 많은 아파트에서는 아무도 놀이터를 새로 만드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항의도 해보고 방법도 찾아봤지만, 수 백 수 천 만원의 예산이 필요한 일이라 주민들이 동의하지 않아 어렵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아쉬운 대로 우리는 철거된 놀이터에 플라스틱 미끄럼틀이며 시소 같은 것을 내다 놓았는데, 잡초가 무성한 놀이터는 이제 사실상 아이들이 뛰어놀 수 없는 공간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수 천 개의 놀이터는 2015년 1월, 동시에 폐쇄 되었고,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놀이터를 잃었다.
'놀 권리'를 빼앗긴 아이들은 안타깝게도 이렇게 길 위에 테이프를 붙여가며 스스로 놀이공간을 찾아가고 있다.

▲ 분필 놀이터에서 마음껏 낙서하는 아이들


어디라도 좋다! 끝도 없이 이어진 넓다란 길 위에 분필로 마음껏 낙서를 해보자~!

색색의 분필로 무지개도 그리고 꽃도 그리고 뽀로로도 그리며 신이 난 아이들. 


▲ 상당한 퀄리티가 있는 크레용 신짱

분필 놀이터에는 가끔씩 전문가(?)가 그린 듯한 수작들이 눈에 띄었는데 예를 들면 크레용 신짱같은 만화 캐릭터나 


▲ 분필로 그린 뽀로로와 미니언즈 (마치 우리 아이가 그리고 있는 것처럼 나왔다. ㅎ)


아가들의 우상 뽀통령, 그리고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미니언즈 같은 것들이다.



내가 맘에 들었던 건 서울의 야경을 표현한 작품~!



경계는 없었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도로에 분필 대신 물감이 뒤덮고 있었다.

물감과 스폰지로 거리 위의 구름을 만드는 '구름 놀이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처음에 어른 눈치를 보며 손에 묻을까 조심조심 스폰지를 찍어 그리다가


▲ 두 손을 모아 바닥에 찍으며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둘째 군이 표현한 나비, 새, 꽃게.  


나중에는 물감 묻은 스폰지를 손바닥에 문지르는 만행을...; ㅎ



아이들은 온 몸에 묻는 줄도 모르고 그림을 그렸다.

아하하하하... 뭐.. 소..손은 씻고, 옷은 빨면 되지. 그럼그럼...;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퍼레이드, 움직이는 대로



오후 세 시쯤 되니 자원봉사자들이 바닥에 길다란 은박 돗자리(?)를 깔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민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하는 시간'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퍼레이드는 댄스공연에서부터 한복 패션쇼, 쌍절곤 시범, 밸리댄스, 영국 콜드스트림가드 군악대 등 3천 여 명의 시민이 참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 한복 패션쇼(좌) 영국 콜드스트림가드 군악대의 연주(우)

▲ 사람보다 큰 대형 인형이 동원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퍼레이드에서는 체셔가 끄는 케이크 마차에 아이들이 직접 타보는 영광을~ 



거리는 온통 흥겨운 음악과 공연에 들썩들썩 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즐거울 수 있었던 드문 시간이었다.



솜사탕에서 즉석 달고나까지, 먹는 대로



'추억의 먹거리' 행사장에는 솜사탕에서 달고나, 누룽지 튀김 등 각종 전통 먹거리가 있었다.

엄마 손잡고 나들이 갈 때 필요한 것은 역시 '솜사탕', 외국인에게 가장 인기 많은 메뉴는 '호박엿'.

색색의 솜사탕이 만들어지는 모습이나 가위로 엿을 자르며 경쾌한 리듬을 타는 엿장수는 구경하는 것 만으로도 신이 났다.



스티브의 마음을 빼앗은 먹거리는 '올드까까'라는 이름의 인절미 튀김. 

콩고물을 바른 옛날 과자는 내 입에도 착 붙었다.



어린시절 국자 몇 개 태워먹었던 경험이 있다면 누구나 도전의식을 불태웠던 달고나 만들기.

아이들 시켜준다며 줄을 섰다가 결국 스티브와 내가 더 재미있게 참여했다. 

거금 천 원을 내야 하는 유료체험이었지만 직접 만들어 볼 수 있어 인기가 좋았다. 



식탁과 맞바꾼 근사한 하루.

오늘 이 거리에서는 서울시민과 관광객 1만여 명이 웃고 즐겼다고 한다. 


우리는 각종 거리공연과 퍼포먼스를 보면서 흥겨운 음악에 맞춰 주변 의식하지 않고 춤을 췄다.

처음보는 대형 인형과 악수를 하고, 넓디 넓은 세종대로 6차선을 마음껏 활보하며 신 나게 바닥놀이를 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분필로, 물감으로 바닥에 마음껏 낙서를 했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놀 권리'를 찾을 수 있었던 하이서울페스티벌.

서울시 한 복판은 그야말로 거대한 축제의 장이었고, 나는 내가 서울시민인 것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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