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거북 찾아 떠난, 3박 4일 사이판 여행 스케치

'여행은 마음에 휴가를 주지만,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사이판으로 떠나는 날 아침, 이런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여행이라는 것.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떠나지만, 여행에서 만나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여행이라는 달콤한 회피에서 벗어나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라는 조언도 담겨있었다.


틈만 나면 떠날 계획을 세우는 나의 자존감은 어떤 상태인가? 

이번엔 아이들까지 떼놓고 가는데, 나는 단지 양육과 일상 스트레스를 피하고자 떠나는 걸까?


만가지 생각이 들며 괴로울 즈음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Day 1. 일상 해방, 사이판으로



얼마만에 남편과 단둘이 떠나는 여행인지. 

성인만 이용할 수 있는 '자동 출입국심사대'를 통과하며 곁에 아이들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10대에 접어든 딸내미는 이제 잘 따라다니려고 하지 않는다. 나도 할머니 댁에서 사촌들과 노는 것이 더 좋다는 아이를 굳이 설득하지 않았다. 서운해도 슬슬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야 한다. 
비행기는 정시에 도착했고, 자리에 앉자마자 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인생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몇 초보다 더 해방감을 주는 시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중 

여행을 '생각의 산파'라고 했던 보통씨의 문장들을 떠올려 봤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중략)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된다." (p 46)

위안이 된다. 
나흘간의 해방, 새로운 생각을 위한 새로운 장소. 그거면 됐지, 뭐.

15년차 부부는 이렇게 사이판으로 향했다.


▲ 사이판 비치로드를 따라 달리다가 처음 만난 해변. 날은 흐렸으나 아름다운 자연은 그대로였다.



Day 2. 장롱 다이버, 바다거북을 만나다 - 라우라우 비치



다이빙 투어가 예정된 아침. 
밤새 바람이 불고 비가 흩뿌려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어났다. 

다행히 시간이 갈수록 구름이 개더니 이내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 비치 다이빙은 장비를 메고 어느 정도 수심까지 걸어야 한다. 

힘들긴 하지만, 보트에서 뛰어내리는 것보다 심적 부담이 적은 장점이 있다. 

남편과 나는 다이빙 횟수가 20회 미만인 초보 다이버다. 설상가상 남편은 5년 전 꼬 따오, 나는 1년 전 티니안섬에서 마지막 다이빙을 해본 장롱 다이버다. '이렇게 오랜만에 바다로 나가도 괜찮은 걸까?' 걱정이 되었으나 다이빙의 성지라 불리는 사이판인데 그냥 지나칠 수 있나! 매년 수영장 잠수풀에서 함께 리뷰 다이빙을 하며 감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기에 사이판 스쿠버 다이빙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 산호 지형이 이색적인 라우라우 비치


다이빙 샵에서는 우리에게 '라우라우 비치'를 추천했다. 찾아보니 라우라우 비치는 체험 다이빙이나 교육도 많이 하는 곳이라 초보나 오랜만에 시작하는 다이버에게도 좋은 곳이었다. 산호층이 있어 볼거리도 많고, 운이 좋으면 정어리 떼나 이글레이, 상어 등도 볼 수 있다고 했다. 


▲ 아기 거북이와 조우. 해초 뜯어 먹는 모습이 귀여워서 넋놓고 바라봤다.


이날 우리는 두 번의 다이빙을 통해 거북이 세 마리와 니모 두 마리, 알록달록 버터플라이 피시와 담쉘피시 등 열대어를 만났다. 다이빙할 때마다 바다거북을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소원 성취! 지난해 말, 사이판에 불어닥친 태풍의 영향으로 수중환경이 파괴되었을까 걱정이 되었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 사이판 아쿠아리조트의 선데이 브런치, 샴페인과 맥주도 무제한 제공된다. 


다이빙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우리가 묵었던 아쿠아 리조트에는 일요일에만 특별히 '선데이 브런치'라는 해산물 뷔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예약을 해뒀던 터라 바로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햇살 가득한 창가에 앉아 남편과 샴페인 건배를 하니 마치 연애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대화는 돌고 돌아 아이들 추억팔이로 마무리되었지만, 마흔 중반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삶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귀한 자리였다. 가끔 이런 시간도 필요한 듯.


▲ 두 손 꼭 잡고 나선 밤 산책. 쏟아지는 별을 기대했으나 보름달이 휘영청...;
이날 평소보다 달이 10%나 크게 보이는 슈퍼 문이 떴다고.



Day 3. 천연 어항에서 즐긴 스노클링 - 래더 비치, 오비얀 비치



다음 날은 다이빙에 자신이 생긴 남편과 렌터카를 몰고 셀프 스노클링 투어에 나섰다. 이름난 비치보다 한적하고 수중환경이 좋은 곳을 찾고 싶었다. 북쪽에서 바람이 부는 1월은 상대적으로 남부 해변이 잔잔하다는 다이브 인스트럭터의 조언을 이정표 삼아 남쪽 오비안 지역에 있는 래더비치와 오비안비치에 가보기로 했다. 



래더비치는 부서진 산호조각들이 있는 멋진 포인트였으나 파도가 세고 조류가 있어 수영하기 좋지 않았다. 대신 사진찍기 좋은 해식 동굴이 있다. 오랜만에 남편을 모델로 인생샷 도저언~!



래더비치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오비안 비치는 상대적으로 물이 맑고 잔잔해 스노클링 하기 좋았다. 바깥쪽에 리프가 있어 먼바다에서 치는 파도를 막고 물고기를 모아줘 마치 어항 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뻥 뚫린 시야에 맑디맑은 바다는 과연 스노클링 포인트라 불릴 만 했다. 얕은 곳에도 다양한 산호와 물고기들이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오비안 비치는 사실 다이빙 포인트로도 유명하다.



물 좋아하는 부부는 숙소에 돌아와서도 바로 수영장을 찾았다. 아쿠아리조트에는 일반 수영장 외에 5m 잠수풀이 있는데 이곳에서 덕 다이빙, 무호흡 다이빙 등을 맹연습했다는. 남편은 숨을 뱉어 저절로 가라앉는 음성부력 조절에 성공했다. 아무래도 올해는 프리다이빙 강습을 알아봐야 할 것 같다. 


▲ 선셋 포인트인 '서프클럽'에서 만난 황홀한 노을. 



Day 4. 수영복 없이 보낸 하루 - 사이판 북부 투어


 만세 절벽,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군이 일본과 가장 가까운 바다에 몸을 던지며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수영복 한 벌로 거의 모든 일정을 모두 소화한 우리...;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옷을 갈아입고 차를 반납하기 전에 사이판의 관광지를 돌아보기로 했다.    


 자살절벽에서 만난 미군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사이판의 주요 관광지가 모여있는 북부지역에서는 2차 세계대전의 흔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만세 절벽, 자살절벽, 일본군 최후사령부, 한국인 위령탑 등 이름만 들어도 살벌했던 그때를 추측해볼 수 있다. 관광지에는 중국인과 한국인 관광객이 대부분이었는데, 간혹 이곳에 파견 나온 듯한 미군들도 볼 수 있었다.  


 다이빙 명소로 유명한 사이판 그루토


신비로운 푸른 빛을 자랑하는 사이판 그루토에서는 당장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웠다. 그루토는 스노클링 포인트로도 유명하지만, 물속에서 봤을 때 그 진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조류가 세 초보 다이버에게는 무리라고. 아쉽지만 이곳은 실력을 좀 더 쌓아 다시 찾아야겠다. 


 부부의 사진 찍는 법, 각자 카메라로 담는다. ^^ - 새섬 전망대


아이들 없이 여행은 너무 오랜만이라 처음엔 조금 어색하고, 서먹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가 좋아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고 서서히 즐길 수 있었다. 


양육과 업무 부담에서 벗어나기까지 앞으로 10년 남짓.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 사춘기를 거치듯, 부부도 둘만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여행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해결의 길잡이가 되는 것은 틀림없다. 

 

"행복을 얻고 싶다면 길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여행을 떠나야 한다." 

'여행의 기술' 책날개에 쓰인 글귀가 선명하게 와닿는다.

앞으로 좀 더 자주 둘만의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사이판 여행을 다녀와서 지르고 싶은 것이 생겼다. 

프리다이빙 강습과 열대 어류 도감이다.

남편은 다이브 컴퓨터도 하나 장만해서 안전한 여행을 즐기고 싶다고 했다.


한동안 잊고 지냈지만, 

취미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이랑 함께할 수 있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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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글]

· 여행은 마음에 휴가를 주지만,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출처: ㅍㅍㅅㅅ)
· 다이버의 섬, 꼬따오로 떠난 23박 24일 태국여행 스케치  

· 시간이 멈춘 섬에서 보낸 6일, 사이판 티니안 여행

댓글(4)

  • 2019.01.27 17:39 신고

    바닷속에 있는 아기거북이 너무너무귀엽네요~
    저도 나중에 사이판에 놀러가보고 싶어지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 2019.01.28 10:31 신고

      다가가는 줄도 모르고 먹는 데 집중하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어요. ^^
      감사합니다.

  • 2019.01.28 10:57 신고

    여행이 자존감 낮은 사람이 자주하는 행위라고 보진 않지만, 뭐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ㅋㅋ
    전 냥이와 함께하면서 여행을 자주 갈 수가 없게 되었는데, 제 자존감이 높아지진 않았습니다. (음?)
    오랜만에 그린데이님 여행기 보니까 넘나 좋고요- 진아는 이제 사춘기에 돌입하게 되나요. ;ㅁ; 진아야 그럼 내가 대신에 가도 되겠늬? 아, 사이판 너무 좋네요. 저기 다녀오면 다이빙에 대한 막 열의가 불타오를 것 같아요.

    • 2019.02.05 23:27 신고

      여행을 자주 갈 수 없어도 자존감이 높아지진 않는군요. ㅋ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이유님과 여행가고 싶네요. 진정.
      저는 결국 네이버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샨새교로 돌아왔는데, 흐흑. SSL이라는 복병이 기다리고 있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