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보낸 하루, 모스크바를 거쳐 이스탄불로
- 센티멘탈 여행기/한 달쯤, 터키
- 2010. 3. 19. 18:05
"트리에스테, 취리히, 파리." 화면들의 계속되는 호출, 가끔 커서의 초조한 박동을 수반하기도 하는 호출은 언뜻 단단하게 굳어버린 듯한 우리의 삶이 얼마나 손쉽게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냥 복도를 따라 내려가 비행기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몇 시간 뒤에 우리에게 아무런 기억이 없는 장소, 아무도 우리 이름을 모르는 장소에 착륙할 것이다. 오후 3시, 권태와 절망이 위협적으로 몰려오는 시간에 늘 어딘가로, 보들레르가 말하는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이륙하는 비행기가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 기분의 갈라진 틈들을 메우는 것은 즐거운 일 아닌가. 트리에스테, 취리히, 파리. - 이번 여행을 함께한 '여행의 기술' 中 (알랭 드 보통)두꺼운 옷을 넣을까 말까, 즉석카메라를 가져가야 하나, 필름은 몇 롤이나 넣을까와 같은 사소한 고민으로 전날 밤잠을 설치는 통에 정작 아침엔 대충 가방을 싸서 집을 나섰습니다. 탑승시각 1시간 반 전에 공항 도착. 연휴가 낀 주말 오후라 비행기는 당연히 만석. 더구나 늦게 도착해서 좋은 좌석을 받을 리 없습니다. 그래도 국적기를 탈 수 있다는 것을 위안 삼으며 서둘러 게이트를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여행보험 드는 것을 깜빡 잊고 면세구역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두 번의 도장을 받고 x-ray 검색대를 다시 통과하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 외부로 다녀 올 수 있었습니다. 유리벽 하나인데, 들어가긴 쉬워도 일단 면세구역에 들어서면 다시 나가기 어렵더군요.
항공편은 인천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이스탄불로 가는 아에로플로트. 8시간 비행, 4시간 대기, 다시 3시간 비행 일정입니다. 아에로플로트는 낡은 기체와 불친절한 서비스로 다수의 여행자들이 기피하는 항공사이지만 일부 구간의 경우 같은 스카이팀인 대한항공과 코드쉐어 구간이 있어 저렴한 가격으로 국적기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저역시 가장 긴 시간을 비행해야 하는 인천-모스크바 구간은 코드쉐어 편인 대한항공을 타고 비빔밥을 먹으며 편히 여행했습니다.
(* 항공권 가격: 81만 원, Tax 및 유류할증료 포함)
3.1절을 하루 앞둔 일요일 오후 공항의 풍경. 나란히 걸린 태극기가 눈에 들어옵니다.
여행에 있어 가장 설레는 순간은 비행기에 탑승해 이륙을 기다리는 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장거리 노선에만 있는 개별 모니터. 수시로 이동 경로를 체크할 수 있어 편리합니다. 벌써 중국을 지나는 중.
급작스러운 여행 제안에 선뜻 동의해 주고, 좋은 조건의 표를 찾아냈으며 미리 공항에 도착해 두 시간이나 나를 기다려준 고마운 친구. 이번 여행을 자축하며, 그리고 성공적인 여행을 위하여 기분 좋게 건배했습니다. 선택한 맥주는 'MAX'. 햅쌀밥은'농심'. 이웃 기업 블로그의 제품이라 더욱 반가웠습니다.
창밖의 설원을 보니 러시아에 가까이 온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눈이 많이 오면 대륙과 바다의 경계가 저렇게 하얗게 나뉠 수 있을까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불편하기로 악명높은 모스크바 쉐르메쩨보 공항.
트랜짓 데스크에 도착해보니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저 하나의 좁은 문을 통과하려고 몸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 하나가 저 틈에 끼어 온통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비행 시각이 촉박한 여행객들은 새치기를 서슴지 않는데 통제하는 사람은 커녕 근처에 공항직원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상대적으로 왜소한 저희는 뒤로 밀려나기를 수차례. 두 시간 만에 가까스로 게이트를 통과했는데 지나고 보니 X-ray 검색대 앞에 짜증스러운 얼굴을 한 직원 두 명이 보이더군요.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진 않을텐데... 좀 씁쓸했습니다.
모스크바 공항 면세점. 생각외로 내부는 무척 한산했습니다. 곳곳에 흡연 공간이 있어 매캐했지만.
스티브가 출장 다녀오며 가끔 사오는 물건들. 다양한 마트료쉬카(Матрёшка) 인형을 구경하고 유명한 발틱7 생맥주도 한잔 들이키니 대기시간이 금방 갔습니다.
잘생긴 바텐더가 마침 새 캔을 뜯어 Fresh 한 맥주라며 정성껏 따라주니 맛이 더 좋았습니다. 화난 사람들같은 러시아인들의 표정에 슬쩍 주눅이 들어있었는데, 친절히 사진촬영에 응해주고 자신의 사진을 보며 환히 웃는 그의 모습은 좀 뜻밖이었달까요~
기내식 세 번, 맥주 세 캔... 인천 공항을 출발한지 무려 15시간 만에 도착한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
시간은 이미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습니다. 이스탄불 공항은 유럽의 여느 공항과 같은 분위기라 마음이 좀 편해졌습니다. 모스크바 공항을 경험한 후라 모든 것이 고마울 따름. 대중교통은 자정이면 모두 끊기기에 서둘러 택시에 올라타고는 예약한 호텔로 향했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낯선 터키어와 고색창연한 밤거리의 풍경이 이스탄불에 온 것을 실감케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