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보편화 된 음식은 뭘까요? 패스트푸드와 정크푸드의 대명사, 미국문화의 상징, 때로는 경제 지표가 되기도 하는 이 음식은 바로 '햄버거'입니다. 얼마 전 평양의 패스트푸드점에서도 햄버거를 사 먹으려는 주민으로 북새통을 이룬다는 뉴스를 접하고 햄버거를 앞세운 개방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는데요. 아시아에서 중동까지 세계를 하나의 입맛으로 아우르는 햄버거의 위력은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햄버거는 그렇게 만만한 요리가 아니다. EST. 1894 몇몇 거대 프랜차이즈가 햄버거의 인식을 싸구려 한 끼 식사로 만들어 놓았지만 원래 햄버거의 역사는 독일식 '함부르크스테이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비교적 저렴한 다진고기로 만든 스테이크는 미국 도시 노동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이들이 칼과 포크 없이 손쉽게 먹을 수 있도록 빵 사이에 스테이크를 끼운 것이 햄버거의 시초였다는데요. 지글대는 스테이크의 소리와 냄새를 맡으며 점심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을 그들의 모습은 요즘과는 좀 다른 모습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 미국이 아닌 서울 한복판에 처음 햄버거가 선보인 1895년에서 1년을 거슬러 올라가 일그러진 햄버거의 역사를 다시 쓰겠다는 곳이 있습니다. 'EST. 1894'라는 거창한 의미가 담긴 이름이 햄버거집의 상호인데요. 제대로 된 버거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대변이라도 하듯 이 독특한 건물의 매장 입구에는 거대한 무쇠 그릴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무형문화재가 무려 3개월에 걸쳐 만들었다는 42인치의 '로타 그릴'. 가까이서 보니 구멍이 숭숭 뚫린 커다란 무쇠 석쇠 위에서 지글지글 패티와 양파, 번이 구워지고 있더군요. 아래쪽은 화산석을 깔아 220도 이상의 고열을 유지한다는데,이 열기로 구워진 고기에서는 기름기가 뚝뚝 떨어져 고소한 냄새를 피워올리고 있었습니다.
버거의 맛은 패티가 결정한다고들 하죠. 이곳에서는 패티를 미리 만들어 냉동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숙성된 고기를 주문 즉시 무게를 달아 모양을 잡은 후 그릴에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두툼한 패티, 호주산 목등심만을 사용하는 고집스러움에서 패티로 승부하겠다는 자세가 엿보입니다.
거기에 남원에서 공수한 수제 치즈, 무안 양파, 홈메이드 번을 사용해 재료의 질을 높였는데요. 와인바에나 가야 맛볼 수 있는 프래쉬한 샤프 체다를 실컷 먹을 수 있는 곳이라니, 그것만으로도 저는 이미 즐거웠습니다.
패티가 어느 정도 익으면 패티위에 치즈를 올려 녹이고, 양파와 번을 함께 불에 올립니다. 그릴자국이 선명하게 난 햄버거 재료들을 보니 식욕이 마구 동하더군요. 패티가 충분히 익으려면 로타 그릴이 13바퀴가 돌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한 바퀴에 42초, 패티가 구워지는 시간은 9분 10초가 걸립니다.
즉석에서 고기의 무게를 달고, 재료를 썰고, 햄버거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합하면 아무리 빨라도 15분 내로는 먹을 수 없는 햄버거인거죠.
모든 과정은 오픈된 주방을 통해 모두 지켜볼 수가 있는데요. 느릿느릿 햄버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입국에 비치된 리플렛을 훑어보니 문득 '이젠 햄버거에게도 기다리는 예의를 허하자'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습니다. 뭔가 햄버거 앞에 숙연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
15시간 같은 15분이 흐르고 준비된 뜨끈한 햄버거는 언뜻 보기에도 프래쉬한 기운이 감돕니다. 제각 주문한 것은 샤프체다치즈가 들어간 햄버거 세트였는데요. 여기에 베이컨이 들어간 베이컨 치즈 버거나 고르곤졸라와 모짜렐라 치즈가 들어간 구어메 버거도 주변의 추천메뉴였습니다.
수제 버거에는 맥주가 단짝이죠. 메뉴에 Beer가 있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장님은 바로 옆 재동 슈퍼를 권하셨는데요. 덕분에 시원한 맥스를 저렴하게 마실 수 있었습니다.
한입 베어 무니 쥬시하게 씹히는 소고기 패티. 가운데가 살짝 붉은 미디엄 웰던으로 구워져 풍부한 육즙과 함께 진한 고기 향이 코끝을 자극합니다.
세트메뉴에 포함된 웨지 포테이토는 푸짐하지는 않지만 제대로 튀겨낸 포실한 감자튀김을 맛볼 수 있습니다. 패스트푸드점의 냉동감자와는 차원이 다른 맛. 감자튀김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
가회동 삼거리에 있는 EST.1894는 삼청동이나 북촌에서의 데이트를 즐긴 후에 찾기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버거는 2층 좌석에서도 먹을 수 있지만, 햇살 좋은 날에는 바로 앞 대리석 벤치나 삼청 공원 등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먹는 재미도 괜찮죠. 특히 올해는 삼청동 길이 '단풍과 낙엽의 거리'로 지정되어 11월 중순까지 낙엽을 쓸어내지 않기로 했다니 가을 분위기 물씬 느끼며 햄버거 하나 들고 소풍을 나서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버거의 가격대는 1만 원 선, 탄산음료는 기본 포함되어 있고요. 웨지 포테이토가 포함된 세트 가격은 거기에 1,500원을 더하면 됩니다.
아이가 잘 걷게 된 이후로는 유모차 없이 다니기를 생활화하고 있다. 활발히 걸으며 새로운 것을 보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걸을 권리를 주고, 앞으로의 여행을 위해 체력도 키우자는 소박한 의도에서 유모차를 놓고 다니고 있는데, 한참 호기심 왕성한 세 살배기 아이와 함께 길을 나선다는 건 참 쉽지 않다. 특히 아이가 낮잠이라도 자는 때는 눕힐 곳을 찾아 헤매는 일도 다반사. 이날도 스티브가 찾아낸 대리석 벤치에 자는 아이를 눕히고, 마침 앞에 있는 수제버거집을 발견해 잠깐의 여유를 즐겼는데, 생각외로 이 집. 대박이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