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뒷길을 걷다, 난뤄구샹(南锣鼓巷)

그날, 거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길바닥은 물론이고 지붕 위에까지 사람들이 가득 찼다. 중국 최후의 황후가 시집을 가는 성대한 의식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고 있었다. (......) 마침내 완룽이 나타났다. - 제국의 뒷길을 걷다 (김인숙) P.124


완룽은 푸이와 동행하지 못했다. 일본이 패망하고 만주국이 그 깃발을 내린 후 푸이가 일본으로 망명을 시도할 당시, 완룽은 이미 절망적인 상태의 아편 중독자였다. 그녀는 혼자서는 일어서지도 못했고, 씻지도 않았고, 아무 데나 똥오줌을 묻히는 상태였다. 대부분의 시간 정신이 혼미하여 사람을 잘 알아보지도 못했는데, 헛소리처럼 중얼거리는 말은 그의 아비에 대한 저주에 가까운 욕설뿐이었다. 어째서 하필이면 아비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운명에 대한,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한 최초의 단추였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 순간에 대한 노여움과 분노였을 것이다. 자신을 황후로 만든 아버지...... 그것은 왜 나를 낳으셨어요, 라고 묻는 것만큼이나 가혹한,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자기 존재의 부정이었다. - P121

난뤄구샹(南锣鼓巷)에 도착해 마지막 황제 푸이와 황후 완룽의 비극적인 옛이야기를 떠올렸다. 완룽의 사가는 난뤄구상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후통중 '마오얼 후통'에 자리하고 있다. 그녀가 태어날때만 해도 그곳은 아름다운 대저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낡고 변해버린 모습. 그곳을 둘러보면, 제국의 멸망보다 더한것, 한 여자의 완전한 파멸이 훼손의 흔적 속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고 한다.
 
생각 같아서는 완룽의 생가에 가 보고 싶었지만 늦은 오후라 어린 시절 그녀가 뛰어놀았을 골목을 돌아보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그런데... 완전히 낡고 변해버린 훼손의 흔적이라기엔 너무 멋진 광경. 난뤄구상에는 젊은 감각의 카페와 음식점, 트랜디한 샵들이 들어차 있었다. 
 
전통가옥의 기와와 문양을 그대로 살려 멋스러운 카페로 개조한 것이 마치 한국의 삼청동이나 홍대 앞 거리를 보는 분위기였다.

사진사들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는다.

큰길에서 조금만 골목으로 들어가면 작은 가게들이 있고, 운이 좋다면 집 앞에서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도 만날 수 있다. 고즈넉한 골목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마치 그곳에서 사는 사람인 것처럼, 혹은 그곳에 사는 친구나 친지를 방문하는 길인 것처럼 시침을 뚝떼고 들어선 이름 없는 후통에서, 당신은 오히려 북경의 오래된 숨결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후통은 막다른 길 없이 다시 또다른 후통으로 이어지고, 후통의 수많은 대문 중의 하나를 열면 그 안은 다시 또 골목으로 이어진다. 어느 이름 없는 창에는 새 조롱이 놓여 있고, 오래되어 낡은 마오 주석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 창 아래에서는 길거리 이발사가 그 골목에 사는 누군가의 머리를 자르고 있다. - P. 115

상점 사이에서 발견한 간식거리. 호떡같이 생긴 빵 안에는 부추가 들어 있었다.
 
난뤄구샹의 대로에는 음식점과 옷가게, 인테리어 소품 샵들이 있고,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선술집과 주택들이 섞여 있다. 몇몇 후통에는 완룽을 비롯한 옛 북경의 고관대작이 살았던 저택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옛 저택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는데 너무 늦어서...베이징 인포메이션 센터에 '고택 가이드'가 비치되어 있다.)

어둠이 내린 후통에는 홍등이 켜지고, 색색의 간판들은 제 색을 발한다.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거리 구경. Plastered8라는 상점에서는 북경을 주제로 한 특색있는 티셔츠를 판매했다.

엄습해 오는 추위에 돌아가려던 차에 군밤 장수를 발견했다. 그는 상점 앞의 희미한 등을 불빛 삼아 먼저 온 손님의 밤을 저울질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정겨워 나도 그가 산 만큼의 군밤을 주문했다.

달궈진 조약돌 사이에서 따끈하게 데워진 단밤들.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한참을 따뜻하게 먹었다.

갑자기 아저씨가 쏜살같이 달아난다. 순간 두려워 주위를 둘러보니 공안 한 명이 골목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불법 노점행위를 하면 일당의 몇십 배에 해당하는 벌금을 내야 한다니 나도 얼른 봉지를 숨겼다. 

네온사인으로 번쩍이는 북경 시내와 비교하면 난뤄구샹의 밤은 참 어둡다. 황후 완룽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었지만 그저 옛 후통 거리가 아닌, 지금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사랑받는 곳이라 더욱 매력적인 곳. 난뤄구샹은 내게 또 다른 이름의 베이징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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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에서는 김인숙 씨의 산문집 '제국의 뒷길을 걷다'를 가지고 가 틈틈이 읽었습니다. 이 책에는 베이징에 곳곳에 남은 청 제국의 역사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요. 마지막 황제인 푸이와 그의 아내 완룽의 비극적인 운명을 제국의 뒷길에 비유한 부분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한평생 제국의 부활에 힘썼으나 이용당하기만 했던 푸이와 아편중독자가 되어 비참하게 죽었던 완룽. 그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걷는 초겨울 베이징의 후통은 조금 쓸쓸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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