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서 피아노를 사다.
- 소셜 미디어 단상
- 2012. 3. 8. 13:16
들인지는 보름이 넘었는데, 이제서야 올리는 늦은 후기.
페이스북에서 피아노를 샀다. 페이스북이 무슨 소셜 커머스도 아니고 피아노를 샀다. 피아노씩이나 되는 물건을 사진만 보고, 실사 한번 확인하지 않고, 아무리 페이스북 '친구'라지만 딱히 친분이 있다고 하기에도 어려운 분께... 덜컥! 주변에 얘기하니 다들 걱정어린 한마디씩을 한다.
사건의 발단은 첫째의 봄방학이었다. 2주나 되는 어린이집 방학에 뭘 하며 지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즈음, 페북에 멋들어진 피아노 사진이 한 장 올라왔다.
어릴 적 피아노에 대한 추억은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을 거다. 건반이 프린트된 종이에 손가락 숫자를 써가며 상상 연주를 하던 추억, 처음 피아노를 들이던 때 설레던 마음, 하지만 피아노 선생님께서 그려주신 사과 열 개는 왜 세 번만 치고도 다 칠하고 싶던지... 하농 같은 재미없는 악보는 왜 연습해야 하는지 늘 궁금하기도 했었다. 처음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쳐냈을 때 기뻐하시던 아버지의 모습, '사랑의 기쁨(Plaisir D`amour)' 반주에 맞춰 나나 무스꾸리 같이 노래를 따라 부르시던 어머니... 한동안 잊고 지냈던 추억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며 현재의 내 아이와 오버랩 되었다.
몇 달 전부터 중고 피아노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있던 터라 남편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페이스북에서 연식, 가격, 외관 등을 확인하고 피아노 놓을 자리를 물색해봤다. 점찍은 공간을 재어보니 거짓말처럼 딱 피아노 사이즈! 줄자의 빨간 숫자를 확인하는 순간 어찌나 가슴이 콩닥거리던지. 결국, 난 사진을 본 지 한 시간 반 만에 구매 결정 댓글을 달았다.
사진만 보고도 어렵지 않게 구매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건 온라인에서 쌓은 신뢰가 큰 역할을 했다. 앞서 밝혔듯 판매자와 난 사실 그닥 친한 관계가 아니다. 오래전, 회사에서 잠깐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SNS가 없었다면 아마 앞으로 평생 볼 일이 없는 사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블로그(김준의 열린 머리속)와 페이스북에 꾸준히 들락거리며 일상을 공유하고 댓글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왠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 같다. 처음엔 실력 있는 카투니스트이자 디자이너, 내가 즐겨보던 잡지 PAPER의 멤버였다는 사실에 호감이 갔지만, 시간이 흐르니 딱히 특별한 의미를 담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앞으로도 그 자리에 늘 있을 것이란 신뢰가 생겼다. 결국 SNS를 통해 오랜 기간 자연스럽게 쌓인 신뢰를 바탕으로 난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준님이 치던 피아노를 구매, 준님은 신뢰 하나로 장터에 내어 놓은지 단 몇 시간 만에 물건을 팔았다.
피아노를 들이던 날, 신난 진아.
가족 모두가 모여있던 주말 오후에 배달된 피아노.
이렇게 준님의 피아노가 우리 집으로 왔다. 피아노는 다른 악기와 달리 '들인다'고 표현한다. 가구처럼 큰 몸집에 진짜 맘먹고 '들어서' 옮겨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족의 추억을 만들어 가는 매개체이기에 새 식구를 맞이할 때 쓰는 '들이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것 같기도 하다.
운반 과정은 상당히 불만스러웠으나 다행히 큰 이상은 없었다. 자식을 입양하는 심정으로 피아노를 받는 우리와는 다르게 거친 손놀림으로 일관하는 운반업자를 보니 맘이 아팠지만 이후 도착한 젠틀하신 조율사 덕에 마음을 풀었단.
오랜만에 보는 조율 도구들. 많기도 하다.
섬세한 손놀림. 조율하는 소리마저도 기분 좋은 시간.
구매한 피아노는 e-118, 일련번호가 15로 시작하는 업라이트형 피아노로 e-118이 처음 생산되기 시작한 1990년에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전문가에게 들으니 중고 피아노는 1980년대 후반~ 1996년까지 만들어진 것을 최고로 쳐준다고 한다. 이때의 피아노는 전량 한국 내 생산으로 마감이 꼼꼼하단다. 90년대 후반부터는 비용절감을 위해 생산공장을 중국으로 옮기기 시작했다고. 그래서 96년까지의 피아노는 수명이 60년, 요즘 나오는 피아노는 평균 수명이 길어야 30년이라고 한다. 정말 득템한 기분~
이 피아노는 뚜껑이 그랜드 피아노처럼 살짝 들리는 것이 포인트다. 실제 집에서 연주할 때는 소음 문제로 열고 연주할 일은 없겠지만, 가끔 열어놓고 보는 것 만으로 예쁘고 좋다. 급한 대로 아이패드에 악보를 하나 받아 놓고 딸내미를 앉혀 설정 샷을 찍어봤다. ^^ 요즘 진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열쇠 구멍에 배꼽을 맞추고 앉아 고사리 손으로 '도레미파솔'을 연주한다. 남편은 피아노 치는 남자에 대한 로망을 키우며 바이엘을 치고 있다. 나는 남편이 곱게 프린트 해준 캐논 변주곡 악보를 연습 중이다. 소싯적엔 나름 체르니 50번 치던 소녀였는데, 이젠 오선지를 벗어난 음표는 읽기조차 어렵다. 하지만 언젠가 가족과 연탄곡을 연주할 날을 상상하며 즐겁게 연습하고 있다.
피아노와 사랑에 빠진 남편이 추천해준 배틀 & 연탄곡.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에 쓰인 연주곡이란다.
과연 나도 이렇게 연주할 수 있는 날이 올까?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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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아직도 SNS의 대세는 페이스북이다. Path 같은 소그룹 서비스나 Pinterest 같은 이미지 중심의 버티컬 서비스가 뜨고, 다양한 SNS 매시업과 플랫폼이 등장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익숙한 페이스북에 둥지를 틀고 추가로 다른 서비스를 활용해 보는 추세인 것 같다. 월스트릿 저널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지난 1월 사람들이 facebook에서 보낸 시간은 약 7시간이나 된다고 한다. 트위터 21분, 핀터레스트나 텀블러는 1시간 20분인 것에 비하면 아직도 압도적인 인기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의 페이스 사용자도 약 500만 명. '페북 끼고 사는 당신, 행복한가요?' 라는 기사가 나올 만큼 보편화 됐다. 이용자가 많아지고, 친구 수가 많아지면서 이런저런 문제들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아직도 사용하기에 따라 가능성이 무한한 곳임에 틀림이 없는 듯. 물건도 사고 팔고 말이다. ^^
페이스북에서 피아노를 샀다. 페이스북이 무슨 소셜 커머스도 아니고 피아노를 샀다. 피아노씩이나 되는 물건을 사진만 보고, 실사 한번 확인하지 않고, 아무리 페이스북 '친구'라지만 딱히 친분이 있다고 하기에도 어려운 분께... 덜컥! 주변에 얘기하니 다들 걱정어린 한마디씩을 한다.
사건의 발단은 첫째의 봄방학이었다. 2주나 되는 어린이집 방학에 뭘 하며 지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즈음, 페북에 멋들어진 피아노 사진이 한 장 올라왔다.
(photo by 김준)
어릴 적 피아노에 대한 추억은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을 거다. 건반이 프린트된 종이에 손가락 숫자를 써가며 상상 연주를 하던 추억, 처음 피아노를 들이던 때 설레던 마음, 하지만 피아노 선생님께서 그려주신 사과 열 개는 왜 세 번만 치고도 다 칠하고 싶던지... 하농 같은 재미없는 악보는 왜 연습해야 하는지 늘 궁금하기도 했었다. 처음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쳐냈을 때 기뻐하시던 아버지의 모습, '사랑의 기쁨(Plaisir D`amour)' 반주에 맞춰 나나 무스꾸리 같이 노래를 따라 부르시던 어머니... 한동안 잊고 지냈던 추억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며 현재의 내 아이와 오버랩 되었다.
몇 달 전부터 중고 피아노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있던 터라 남편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페이스북에서 연식, 가격, 외관 등을 확인하고 피아노 놓을 자리를 물색해봤다. 점찍은 공간을 재어보니 거짓말처럼 딱 피아노 사이즈! 줄자의 빨간 숫자를 확인하는 순간 어찌나 가슴이 콩닥거리던지. 결국, 난 사진을 본 지 한 시간 반 만에 구매 결정 댓글을 달았다.
사진만 보고도 어렵지 않게 구매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건 온라인에서 쌓은 신뢰가 큰 역할을 했다. 앞서 밝혔듯 판매자와 난 사실 그닥 친한 관계가 아니다. 오래전, 회사에서 잠깐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SNS가 없었다면 아마 앞으로 평생 볼 일이 없는 사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블로그(김준의 열린 머리속)와 페이스북에 꾸준히 들락거리며 일상을 공유하고 댓글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왠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 같다. 처음엔 실력 있는 카투니스트이자 디자이너, 내가 즐겨보던 잡지 PAPER의 멤버였다는 사실에 호감이 갔지만, 시간이 흐르니 딱히 특별한 의미를 담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앞으로도 그 자리에 늘 있을 것이란 신뢰가 생겼다. 결국 SNS를 통해 오랜 기간 자연스럽게 쌓인 신뢰를 바탕으로 난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준님이 치던 피아노를 구매, 준님은 신뢰 하나로 장터에 내어 놓은지 단 몇 시간 만에 물건을 팔았다.
피아노를 들이던 날, 신난 진아.
가족 모두가 모여있던 주말 오후에 배달된 피아노.
이렇게 준님의 피아노가 우리 집으로 왔다. 피아노는 다른 악기와 달리 '들인다'고 표현한다. 가구처럼 큰 몸집에 진짜 맘먹고 '들어서' 옮겨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족의 추억을 만들어 가는 매개체이기에 새 식구를 맞이할 때 쓰는 '들이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것 같기도 하다.
운반 과정은 상당히 불만스러웠으나 다행히 큰 이상은 없었다. 자식을 입양하는 심정으로 피아노를 받는 우리와는 다르게 거친 손놀림으로 일관하는 운반업자를 보니 맘이 아팠지만 이후 도착한 젠틀하신 조율사 덕에 마음을 풀었단.
오랜만에 보는 조율 도구들. 많기도 하다.
섬세한 손놀림. 조율하는 소리마저도 기분 좋은 시간.
구매한 피아노는 e-118, 일련번호가 15로 시작하는 업라이트형 피아노로 e-118이 처음 생산되기 시작한 1990년에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전문가에게 들으니 중고 피아노는 1980년대 후반~ 1996년까지 만들어진 것을 최고로 쳐준다고 한다. 이때의 피아노는 전량 한국 내 생산으로 마감이 꼼꼼하단다. 90년대 후반부터는 비용절감을 위해 생산공장을 중국으로 옮기기 시작했다고. 그래서 96년까지의 피아노는 수명이 60년, 요즘 나오는 피아노는 평균 수명이 길어야 30년이라고 한다. 정말 득템한 기분~
이 피아노는 뚜껑이 그랜드 피아노처럼 살짝 들리는 것이 포인트다. 실제 집에서 연주할 때는 소음 문제로 열고 연주할 일은 없겠지만, 가끔 열어놓고 보는 것 만으로 예쁘고 좋다. 급한 대로 아이패드에 악보를 하나 받아 놓고 딸내미를 앉혀 설정 샷을 찍어봤다. ^^ 요즘 진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열쇠 구멍에 배꼽을 맞추고 앉아 고사리 손으로 '도레미파솔'을 연주한다. 남편은 피아노 치는 남자에 대한 로망을 키우며 바이엘을 치고 있다. 나는 남편이 곱게 프린트 해준 캐논 변주곡 악보를 연습 중이다. 소싯적엔 나름 체르니 50번 치던 소녀였는데, 이젠 오선지를 벗어난 음표는 읽기조차 어렵다. 하지만 언젠가 가족과 연탄곡을 연주할 날을 상상하며 즐겁게 연습하고 있다.
피아노와 사랑에 빠진 남편이 추천해준 배틀 & 연탄곡.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에 쓰인 연주곡이란다.
과연 나도 이렇게 연주할 수 있는 날이 올까?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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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아직도 SNS의 대세는 페이스북이다. Path 같은 소그룹 서비스나 Pinterest 같은 이미지 중심의 버티컬 서비스가 뜨고, 다양한 SNS 매시업과 플랫폼이 등장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익숙한 페이스북에 둥지를 틀고 추가로 다른 서비스를 활용해 보는 추세인 것 같다. 월스트릿 저널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지난 1월 사람들이 facebook에서 보낸 시간은 약 7시간이나 된다고 한다. 트위터 21분, 핀터레스트나 텀블러는 1시간 20분인 것에 비하면 아직도 압도적인 인기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의 페이스 사용자도 약 500만 명. '페북 끼고 사는 당신, 행복한가요?' 라는 기사가 나올 만큼 보편화 됐다. 이용자가 많아지고, 친구 수가 많아지면서 이런저런 문제들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아직도 사용하기에 따라 가능성이 무한한 곳임에 틀림이 없는 듯. 물건도 사고 팔고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