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서 피아노를 사다.

들인지는 보름이 넘었는데, 이제서야 올리는 늦은 후기.
 
페이스북에서 피아노를 샀다. 페이스북이 무슨 소셜 커머스도 아니고 피아노를 샀다. 피아노씩이나 되는 물건을 사진만 보고, 실사 한번 확인하지 않고, 아무리 페이스북 '친구'라지만 딱히 친분이 있다고 하기에도 어려운 분께... 덜컥! 주변에 얘기하니 다들 걱정어린 한마디씩을 한다.

사건의 발단은 첫째의 봄방학이었다. 2주나 되는 어린이집 방학에 뭘 하며 지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즈음, 페북에 멋들어진 피아노 사진이 한 장 올라왔다. 

(photo by 김준)

영창. 87년산. E-118어 모델. 제조번호 159****.
(유희열이 치던 것도 아니고) 김준이 치던 피아노입니다. 이번에 이사를 가게 되어 눈물을 흘리며 팔게 되었습니다.
가격 : **만원 (운송비 조율비 포함). 높이 118㎝. 길이 150㎝. 폭 61㎝.
-중략-
관심있으신 분들 연락하세요.

어릴 적 피아노에 대한 추억은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을 거다. 건반이 프린트된 종이에 손가락 숫자를 써가며 상상 연주를 하던 추억, 처음 피아노를 들이던 때 설레던 마음, 하지만 피아노 선생님께서 그려주신 사과 열 개는 왜 세 번만 치고도 다 칠하고 싶던지... 하농 같은 재미없는 악보는 왜 연습해야 하는지 늘 궁금하기도 했었다. 처음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쳐냈을 때 기뻐하시던 아버지의 모습, '사랑의 기쁨(Plaisir D`amour)' 반주에 맞춰 나나 무스꾸리 같이 노래를 따라 부르시던 어머니... 한동안 잊고 지냈던 추억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며 현재의 내 아이와 오버랩 되었다.

몇 달 전부터 중고 피아노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있던 터라 남편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페이스북에서 연식, 가격, 외관 등을 확인하고 피아노 놓을 자리를 물색해봤다. 점찍은 공간을 재어보니 거짓말처럼 딱 피아노 사이즈! 줄자의 빨간 숫자를 확인하는 순간 어찌나 가슴이 콩닥거리던지. 결국, 난 사진을 본 지 한 시간 반 만에 구매 결정 댓글을 달았다.

사진만 보고도 어렵지 않게 구매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건 온라인에서 쌓은 신뢰가 큰 역할을 했다. 앞서 밝혔듯 판매자와 난 사실 그닥 친한 관계가 아니다. 오래전, 회사에서 잠깐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SNS가 없었다면 아마 앞으로 평생 볼 일이 없는 사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블로그(김준의 열린 머리속)와 페이스북에 꾸준히 들락거리며 일상을 공유하고 댓글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왠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 같다. 처음엔 실력 있는 카투니스트이자 디자이너, 내가 즐겨보던 잡지 PAPER의 멤버였다는 사실에 호감이 갔지만, 시간이 흐르니 딱히 특별한 의미를 담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앞으로도 그 자리에 늘 있을 것이란 신뢰가 생겼다. 결국  SNS를 통해 오랜 기간 자연스럽게 쌓인 신뢰를 바탕으로 난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준님이 치던 피아노를 구매, 준님은 신뢰 하나로 장터에 내어 놓은지 단 몇 시간 만에 물건을 팔았다.

피아노를 들이던 날, 신난 진아.

가족 모두가 모여있던 주말 오후에 배달된 피아노.

이렇게 준님의 피아노가 우리 집으로 왔다. 피아노는 다른 악기와 달리 '들인다'고 표현한다. 가구처럼 큰 몸집에 진짜 맘먹고 '들어서' 옮겨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족의 추억을 만들어 가는 매개체이기에 새 식구를 맞이할 때 쓰는 '들이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것 같기도 하다.

운반 과정은 상당히 불만스러웠으나 다행히 큰 이상은 없었다. 자식을 입양하는 심정으로 피아노를 받는 우리와는 다르게 거친 손놀림으로 일관하는 운반업자를 보니 맘이 아팠지만 이후 도착한 젠틀하신 조율사 덕에 마음을 풀었단.

오랜만에 보는 조율 도구들. 많기도 하다.

섬세한 손놀림. 조율하는 소리마저도 기분 좋은 시간.

구매한 피아노는 e-118, 일련번호가 15로 시작하는 업라이트형 피아노로  e-118이 처음 생산되기 시작한 1990년에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전문가에게 들으니 중고 피아노는 1980년대 후반~ 1996년까지 만들어진 것을 최고로 쳐준다고 한다. 이때의 피아노는 전량 한국 내 생산으로 마감이 꼼꼼하단다. 90년대 후반부터는 비용절감을 위해 생산공장을 중국으로 옮기기 시작했다고. 그래서 96년까지의 피아노는 수명이 60년, 요즘 나오는 피아노는 평균 수명이 길어야 30년이라고 한다. 정말 득템한 기분~

이 피아노는 뚜껑이 그랜드 피아노처럼 살짝 들리는 것이 포인트다. 실제 집에서 연주할 때는 소음 문제로 열고 연주할 일은 없겠지만, 가끔 열어놓고 보는 것 만으로 예쁘고 좋다. 급한 대로 아이패드에 악보를 하나 받아 놓고 딸내미를 앉혀 설정 샷을 찍어봤다. ^^ 요즘 진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열쇠 구멍에 배꼽을 맞추고 앉아 고사리 손으로 '도레미파솔'을 연주한다. 남편은 피아노 치는 남자에 대한 로망을 키우며 바이엘을 치고 있다. 나는 남편이 곱게 프린트 해준 캐논 변주곡 악보를 연습 중이다. 소싯적엔 나름 체르니 50번 치던 소녀였는데, 이젠 오선지를 벗어난 음표는 읽기조차 어렵다. 하지만 언젠가 가족과 연탄곡을 연주할 날을 상상하며 즐겁게 연습하고 있다.
 
 
피아노와 사랑에 빠진 남편이 추천해준 배틀 & 연탄곡.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에 쓰인 연주곡이란다.
과연 나도 이렇게 연주할 수 있는 날이 올까?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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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아직도 SNS의 대세는 페이스북이다. Path 같은 소그룹 서비스나 Pinterest 같은 이미지 중심의 버티컬 서비스가 뜨고, 다양한 SNS 매시업과 플랫폼이 등장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익숙한 페이스북에 둥지를 틀고 추가로 다른 서비스를 활용해 보는 추세인 것 같다. 월스트릿 저널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지난 1월 사람들이 facebook에서 보낸 시간은 약 7시간이나 된다고 한다. 트위터 21분, 핀터레스트나 텀블러는 1시간 20분인 것에 비하면 아직도 압도적인 인기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의 페이스 사용자도 약 500만 명. '페북 끼고 사는 당신, 행복한가요?' 라는 기사가 나올 만큼 보편화 됐다. 이용자가 많아지고, 친구 수가 많아지면서 이런저런 문제들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아직도 사용하기에 따라 가능성이 무한한 곳임에 틀림이 없는 듯. 물건도 사고 팔고 말이다. ^^

댓글(27)

  • 2012.03.08 13:21

    글 잘보고 갑니다...동영상도 넘 잘보고 갑니다...
    저도 나름 피아노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있는 한 사람으로써...
    피아노 들인 님의 마음이 느껴지네...^^ 즐건 하루 되세요!

    • 2012.03.08 22:53 신고

      피아노의 추억을 떠올리면 가족이 함께 떠올라 더 애틋하고 아련한것 같아요. ^^
      영상 넘 멋지죠. ~

  • 2012.03.08 13:22

    피아노의자에 신발이 귀엽네요 - 예전에 테니스공 끼워 두던 것 생각도,,,

    • 2012.03.08 22:55 신고

      아~ 저 신발. (자세히 보면 귀여운 키티가 달려 있답니다. 분명 남자분께 샀는데...? ㅋ)
      같이 따라왔어요. 사진에서처럼 예쁘게 씌워놨답니다. ^^

  • 2012.03.08 13:30 신고

    피아노까진 아니고 부모님 집에 있는 전자 피아노를 가지고 오고 싶은데...
    옮기는 것 때문에 포기하고 있네요...

    전자 피아노야 조율도 필요없겠죠~ ㅎㅎㅎ

    • 2012.03.08 22:57 신고

      전자피아노는 백화점에 전시된것 지나가며 쳐본것이 전부인데,
      들어보니 요즘 디지털 피아노는 건반이나 소리가 진짜 피아노 같다고 하더라구요.
      제 페북 댓글을 보니 요즘엔 층간소음 때문에 오히려 디지털 피아노를 선호한다고도 하네요.
      그래도 전 오리지널이 좋아요~ ^^

    • 2012.03.09 09:01 신고

      전 그냥 동생이 중,고등학교때 사용했던 15년은 된 것 같은 낡은 전자 피아노에요~ ㅎㅎ
      아무래도 요즘 것들은 좀 더 좋겠죠?

  • 2012.03.08 13:57

    비밀댓글입니다

    • 2012.03.08 23:26 신고

      준님~. 뭔가를 사고 이렇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었나 싶어요.
      마치 아끼던 물건을 빼앗아 온것 같은 이 기분...;
      페북 댓글에 '중고 피아노 가격에는 판매하는 사람의 상처에 대한 보상도 반영이 되어있다' (맞나요?)라고 하셨는데, 절대 공감합니다.

      피아노는 잘 있으니 걱정 마세요~
      곧(!) 제가 캐논 변주곡을 마스터(?)하면 한번 찍어서 올리지요.
      조율 후에 소리가 정말 몰라보게 좋아졌어요.

      참. 분홍신도 잘 따라 왔습니다. 고이 신겨두었어요. ^^

  • 2012.03.08 14:40

    와- 그랜드처럼 살짝 열리는 피아노라니! 정말 맘에 듭니다!! 제가 치던 피아노는 그냥 피아노라서 제가 멋대로 뚜껑을 열어놓고ㅋㅋㅋ 치곤 했었지요- 지금은 손가락이 굳어서...T_Tㅋ 애기가 신나하는 모습이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 2012.03.08 23:05 신고

      그랜드 피아노처럼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도 않고, 분위기도 낼 수 있어서 좋아요~
      손가락 굳는거... 그거 눈도 따라갑니다. 오선지를 벗어난 음표가 도무지 읽히지 않더라구요. ㅠ

  • enkay
    2012.03.08 17:00

    넘 좋아보여요~~ 저도 조만간 곧 장만해야 할 것 같은데 ^^
    아이들 피아노 진짜 넘 좋아하네요. 저희 딸도 피아노 가르쳐달라고 노래를 하고 있는데 말이죠.. ㅎ

    • 2012.03.08 23:20 신고

      취미로 하는 피아노는 글을 읽을 수 있고, 손가락에 어느정도 힘을 줄 수 있을때 가르치는 것이 좋다고 하더라구요.
      (엔케이님댁 따님은 영어로 편지를 쓸 정도이니 그건 문제 없겠네요.)

      그 때가 한국 나이로 7살 정도라고 해서 일단 저는 피아노와 친해지라고 음계만 몇번 알려주고 그냥 두고 있어요.
      제가 반주하며 동요 부르는 재미는 참 좋네요~
      얼른 하나 장만하시길! ^^

  • 2012.03.08 21:18

    페이스북에도 사람이 살고 있죠. 그리고 그 사람들로 하여금 추억을 기억하고, 새로운 추억을 써 내려가기도 해요.
    멋져요. 초록날님도, 준님도! (저도 준님 블로그는 몰래 추가해놓고 슬금슬금 보곤 한답니다 ㅎ)
    저도 뭔가 괜찮은 물건이 생기면 페이스북을 한번 애용해볼까 싶기도 하네요. 허허..^^

    • 2012.03.08 23:23 신고

      페이스북을 통해 제이유님과 우쿠빵님의 연애기를 훔쳐보는 것도 참 재미있어요. 조금씩 다른 시각도 볼 수 있고...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지~ 추억하기도 하고.
      함께 호주로 떠나는 커플이 부러울 따름이에요. 흑흑.

  • 라이
    2012.03.10 00:27

    나의 피아노에 대한 추억이란 매우 다크합니다요.
    1. 백년을 쳐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법한 손놀림으로 피아노를 치던 언니(음대 나왔음)에 대한 열등감.
    2. 피아노 치기 싫어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때린다고 거짓말을 했던... 생애 최초의 거짓말에 대한 죄책감.
    3. 피아노 치기 싫어 피아노 선생님 손가락을 물어버린 오빠에 대한 동질감.

    • 2012.03.11 01:23 신고

      정말 어두운 기억이네.. ㅠㅠ 어쩌다가...;

      피아노 구입의 계기는 진아였지만 들여놓고 보니 내가 제일
      많이 치고 있는듯. ㅎ
      남편과 내가 잘 치고 있는 것 만으로도 만족할 각오가 되어 있어요. ^^

  • stranger
    2012.03.10 17:31

    흠...... youtube video URL을 적으면 저는 차단되어서 사용할 수 없다는 창이 뜨는군요.
    처음엔 이유를 모르고 아니, 전에 칭찬드린 죄밖에 없는데 왜 차단하셨을까! 깜짝 놀랐네요.

    제가 나누고 싶었던 곡은 '권순훤 연주, Sonata No.8 Pathetique 3rd movt.' 입니다.

    • 2012.03.11 01:38 신고

      아~니. 제가 stranger님을 차단할리가요!
      사실 궁금해서 IP 검색을 해보긴 했습니다. (캘거리에 계시다는 것 밖에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
      http://youtu.be/Xqnd2Z2n-Ks 이 영상 말씀하시는 건가요?
      새벽에 들으니 더욱 센치해 지는 좋은 연주네요.
      북마크 해놨습니다. :)


    • 2012.03.13 13:13

      비밀댓글입니다

    • stranger
      2012.03.13 14:14

      http://youtu.be/hOcryGEw1NY
      그린 데이님의 포맷을 따라 했더니 글이 올려지는군요. 내친김에 하나 더 :)
      http://youtu.be/W0UrRWyIZ74
      이 곡만 들으면 저는 동생 생각이 납니다.

    • 2012.03.13 16:38 신고

      덕분에 좋은 연주 잘 들었습니다. (저 현란한 악보를 치려면 전 대체 얼마나 연습해야 할까요? ...;)
      동생과 음악은 어떤 사연이 있는지, 말씀하시려는 추억이 무엇인지 궁금해 지네요.

      벤쿠버에 사시는군요. 저도 캐나다에 추억이 많은데...^^

  • 2012.03.12 15:08

    해머건반이라고 해서 터치감을 피아노랑 비슷하게 만든 전자피아노가 있긴 하지요.
    친정집에 있는 것이 대략 80년에 산 것이니 아직 수명은 남아 있는 건가요?ㅎ
    피아노 색상도 예쁘고 좋아 보이네요. 부럽습니다.
    피아노 연주 영상을 보니 악보 구해서 저 곡 연습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

    • 2012.03.13 16:41 신고

      아~ 해머건반이요. 그렇군요. 하나 배웠네요.
      친정집 피아노, 80년대...
      아딸라님 연배가 저랑 비슷하신가 봅니다. ^^

  • 2012.03.13 09:42 신고

    저도 어렸을적부터 피아노를 쳤었어요. 근 7년을 배웠는데 사실 솜씨가 썩 좋진 못했다는 .. 음;
    중학생이 되고 더이상 피아노 학원도 가지 않고, 점점 먼지만 쌓여가다가 가세가 기울면서 결국 팔아버렸는데
    어른이 되고나니 다시 한 번 피아노도 배워보고 싶고 이래저래 아쉽네요!
    어렸을 때 음악과 함께 자라면 그것만큼 좋은 정서교육이 없지요! 진아는 이래저래 행복한 아이네요. :)

    • 2012.03.13 16:43 신고

      위에 설명한 이유 때문에 피아노는 중고 시장이 더 활성화 되어 있다더라구요.
      저도 대학 다닐 즈음 아시는 분께 드렸는데, 어찌나 후회되던지...
      ^^ 진아의 연주, 언젠가 블로그에 올려볼 날이 오겠죠?

  • 2012.04.15 02:59 신고

    그린데이님도 피아노가 ^^ 저희도 몇달전에 마련마련 ~ 블로깅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