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아이와 함께한 세부-보라카이, 7박 9일 여행스케치

초등학생 오빠 둘에 꼬맹이 유아 셋. 

평소 할머니댁에서 만나면 잘 어울려 놀곤 했으니 뭉치면 어디서든 즐겁다.

꼬맹이들은 밀가루처럼 찰진 모래로 높이높이 성을 쌓고, 오빠들은 날랜 수영 솜씨로 색색의 물고기를 쫓는다. 

비치체어에 길게 누운 어른 셋은 차가운 산미구엘을 들이키며 망중한을 즐긴다.


오후 2시부터는 아이들의 낮잠시간. 때맞춰 어른들의 마사지 타임도 시작된다.

한숨 깊이 자고 기분이 좋은 아이들은 간식을 찾는다. 냉장고에 쌓아둔 망고와 망고스틴으로 열대과일 잔치를 벌인다.


해가 기울면 바다로 나가 세일링 보트를 탄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석양을 바라본다. 이따금씩 발에 스치는 시원한 바닷물이 기분 좋다.

숯불 연기가 피어오르는 해변식당에서 바비큐와 갈릭 라이스로 저녁식사를 한다. 

비치 바에서 모히토와 망고 쉐이크를 한 잔씩 들고, 별이 쏟아지는 낭만 보라카이를 누린다.


......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 우리가 그린 그림은 그랬다.





Day 1. [인천 - 세부] 다섯 아이와 어른 셋, 세부로

진아를 기준으로 맨 왼쪽부터 다섯 살 사촌 동생, 6학년, 4학년이 되는 오빠들, 진아, 그리고 동생 정균.

다섯 아이의 나이를 모두 합쳐도 어른 한 명의 나이가 되지 않는다. ^^;

생각해보면 시작부터가 무모했다. 

저가항공, 왕복 밤비행, 국내선 이동에 버스와 배까지. 그야말로 산넘고 물건너 가는 험난한 여정.

열 개의 짐, 다섯 명의 아이들, 아무리 오빠들이 짐을 들고 꼬맹이들을 챙긴다고 해도 손이 부족했다.  

우리가 세운 계획은 그야말로 '상상속에나 존재하는 이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벌써 사흘은 지난 것 같았던 첫날 밤 10시, 인천공항에서 이륙을 기다리며 



Day 2-3. 세부, 호텔놀이란 이런것?


그래도 일단 호텔에 도착하니 아이들은 신이 났다.
새벽에 도착해서 피곤할 법도 한데, 아침부터 수영을 한다며 부산을 떤다.
 



"필리핀은 일년 내내 여름만 있는 여름나라야? 우와! 그럼 매일매일 수영할 수 있어서 좋겠다."
수영장만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천국. 
아이들과의 여행은 아무리 대도시라도 휴양지가 되기 마련이다. 



수영 후에는 늘 망고와 망고스틴 한 봉지씩을 까먹었다. 
망고 즙에 손이 불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시누이의 손톱 끝에도 늘 망고스틴 보랏물이 들어 있었다.   


Day 4. [세부 - 보라카이] 조카의 생일여행, 보라카이로



프로펠러가 두 개 달린 소형 비행기. 이래뵈도 100명 정도가 탈 수 있다. 
마치 전세기라도 타는 듯 계류장을 걸어 비행기에 탑승하는 재미난 경험을 할 수 있다. 인증샷 필수~!

사실 이번 여행은 아이들의 봄 방학기간에 맞춰 작년 12월부터 계획했다.

당시 에어아시아에서는 제스트 항공 인수 기념으로 보라카이-인천간 특가 항공권을 내 놓았고, 때맞춰 세부퍼시픽에서도 세부-인천간, 그리고 모든 필리핀 국내선 프로모션을 시작했다. 이리저리 조합을 해보니 인천-세부(세부퍼시픽), 세부-보라카이(세부퍼시픽), 보라카이-인천(에어아시아)를 이용해 세부에서 쇼핑을 하고, 보라카이에서 휴양도 즐기는 최적의 코스를 짤 수 있었다. 


국내선은 프로펠러가 달린 소형기가 운항되지만, 프로펠러기를 타보는 것도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경험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보라카이로 가기에는 국제공항인 깔리보 보다 국내선인 까띠끌란 공항에서 출발하는 게 훨씬 편리하고 이동시간이 적게 걸린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생각보다 이착륙 소음이 심했던 프로펠러기. 

하지만 구름 위로 팔랑팔랑 날개가 도는 모습은 무척이나 낭만적이었다. 


티케팅을 하느라 가족들의 여권정보를 보다가 문득 큰 조카의 생일이 2월 24일인 것을 발견했다.

세부에서 보라카이로 넘어가는 날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이번 보라카이 여행은 네 생일 여행으로 하자~!   



만 11살이 되는 조카의 생일날, 비행기와 배, 버스를 갈아 타고 도착한 길이 7Km의 작은 섬 보라카이.
마침 해변에는 생일 케이크를 닮은 모래성이 조각되어 있었다. 저 끝에 불이라도 붙일 수 있다면 좋을텐데...



아쉬운대로 레몬 카페에서 조각케이크를 사서 조촐한 생일 파티를 했다. 
큰 오빠의 생일인데, 꼬맹이들이 다들 초를 한번씩 불어보겠다고 보채는 통에, 
생일 노래를 네 번이나 부르고 불도 네 번이나 붙였던 에피소드가 있다. ^^



Day 5. 보라카이, 화이트비치를 만나다


다음날 아침에는 보라카이의 화이트비치를 제대로 만날 수 있었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도 바닷물이 허리까지 밖에 오지 않는 완만한 해변은 그야말로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파도도 거의 없고, 간혹 열대어들이 놀리듯 오가는 이곳에서 아이들은 온 몸이 까맣게 타는 줄도 모르고 시간을 보냈다.
시누이와 스티브, 그리고 나는 교대로 아이들을 보며
한국에서 준비해 온 보냉가방에 시원한 산미구엘을 잔뜩 담아와 해변에 앉아, 꿈꾸던 비치체어의 낭만을 만끽했다.


해변 노점에서 구입한 모래놀이 장난감. 우리 돈 3,000원~1만원 사이면 훌륭한 장난감 세트를 살 수 있다.  

찍는 그대로 화보가 되는 보라카이 화이트 비치

화이트비치의 모래는 곱고 잘 뭉쳐 모래성을 만들기 좋다.  
남편과 아이들이 모여 성을 쌓고, 글씨를 파고, 해초를 얹고, 거북이와 공룡 장난감을 장식했다. 
만들고나니 꽤 그럴듯 했다. 완성작을 앞에 두고 가족 사진도 한 컷 찍었다. (글 마지막 사진)



Day 6. 해변 패션의 완성?! 디몰투어


보라카이의 중심가 디몰로 향하다가 해변 미용실을 발견하고는 머리를 땋아보고 싶다는 딸내미.
평소에는 머리에 빗질만 해도 아프다며 도망치는데, 이번에는 신기하게도 30분이라는 긴 시간을 잘 앉아 있는다. 


결국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하는 말이 

"아프리카 공주 같아?" 


한창 '공주'에 빠져있는 아이. 세상에는 디즈니 왕관을 쓴 백인 공주만 있는 게 아니라,
얼굴 색이 검은 아프리카 공주도 있고, 바지 입은 아랍 공주도 있다고 했더니 어느새 그걸 떠올렸나 보다.  


700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필리핀 관광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아일랜드 수비니어는 기념 티셔츠를 파는 체인.
질이 좋고, 가격도 적당하다. 

디몰에서는 보라카이가 새겨진 가족 티셔츠를 하나씩 사 입었다.
꼬맹이들은 각자의 이름을 새긴, 예를들면 JINA ♥ BORACAY 셔츠를 갖게 되었다.


하와이언 바비큐는 인기가 좋아 하루 전에 예약해야 안전하다. 유명한 베이비백립 말고도 사진에 보이는 바비큐 플래터도 꽤 괜찮다. 
돼지고기, 삼겹살, 오징어, 새우, 홍합, 생선, 파인애플 등을 다양하게 숯불에 구운 요리. 망고와 바나나도 함께 맛볼 수 있다. 

저녁 만찬은 보라카이를 찾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들른다는 하와이언 바비큐에서 먹었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일찍부터 자리가 없었다. 다행히 하루 전에 예약을 해둔 터라 해변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제는 '가이드'냐고 묻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8명 대가족 여행의 주동자이니 가이드가 맞기는 한것 같다.  




해변식당의 장점은 어느정도 식사를 마친 아이들이 뛰놀 공간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불이 들어오는 장난감을 몇 개 사주니 서로 던지고 돌려보느라 신이 났다.
  

Day 7. 패러 세일링에서 선셋 세일링까지, 해양스포츠를 만끽하다


패러세일링은 해변의 호객꾼들과 흥정해 가격을 정한 후, 스테이션 3의 선착장에서 출발한다.
정가는 인당 1,500페소. 스테이션 3쪽으로 걸어가면서 여러 명의 호객꾼과 흥정을 하다보면 가격을 깎을 수 있다. 

어느새 여행 막바지. 오늘은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미뤄뒀던 해양 스포츠를 몽땅 해보기로 했다. 
첫타는 패러세일링이었다. 2년 전에 세부에서 시도했다가 키 때문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는 두 명의 조카들을 데리고 시도했다. 
솔직히 배를 타고 낙하산의 줄을 몸에 연결할 때만 해도 좀 떨렸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웬걸? 막상 낙하산이 펴지고 밧줄이 풀리며 높이 날아오르니 마치 열기구를 탄 듯, 바람도, 소음도, 심지어 날고있다는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둥실 하늘로 떠올라 보라카이 비치를 내려다보니 여기가 원래 내가 있던 곳 같다. 



오후에는 비치에서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는 보라카이에서 꼭 해봐야 할 액티비티 중 하나라는 '선셋 세일링'에 나섰다. 
패러세일링을 연결해준 호객꾼이 제시하는 세일링보트 가격이 나름 괜찮아서 
배 한 척을 통으로 빌리고, 해가 진 후에 뭍으로 돌아오는 조건으로 세일링 보트를 예약했다. 



오직 바람만으로 물살을 가르는 세일링 보트는 보기보다 위험하지 않았다. 가장 걱정했던 꼬맹이들도 재미있어 했다. 

배에는 2살 아기도 입을 수 있는 구명조끼도 준비되어 있어서, 온가족이 그물망에 앉아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사진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보라카이의 석양.



Day 8-9. [보라카이 - 인천]  비현실적인 현실, 집으로


내 손에는 언제나 여덟 개의 여권과 여덟 장의 항공권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더욱 험난했다.
버스로 10분, 기다리는 시간 10분, 배로 10분, 다시 버스로 1시간 반, 그렇게 상상도 못했던 아비규환 깔리보 공항을 만났다. 
두 대의 국제선 항공기가 동시에 출발하는지 우리네 시외버스 터미널만한 크기의 공항에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들어찼다. 


새벽 1시 비행기. 대부분 가족여행객, 여자화장실은 단 한 칸 뿐... 

아이를 위한 배려라고는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고, 그나마 작은 대합실 의자에는 먼저 도착한 한국인들이 누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보라카이는 다시 찾고 싶은 멋진 해변이고, 다섯아이와의 힘든 여행도 나름 즐겁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 깔리보 공항만큼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아졌다.
악명높기로 유명한 러시아의 모스크바 공항도 이정도는 아니었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흘렀고, 그렇게 7박 9일의 길고도 짧은 필리핀 여행이 끝났다. 

우리가 직접 만든 보라카이 모래성을 앞에 두고 가족사진을~

남편은 패딩점퍼를 꺼내입으며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문만 열면 해변이었는데, 비현실적인 현실.'라고 표현했다. 
진아는 해변 미용실에서 딴 머리를 아파도 원에 갈 때까지 풀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파오기 시작해 결국 풀고, 대신 '아프리카 공주'시절 사진을 인화해 친구들에게 보여 주기로 했다.)
여행 나흘째부터 많이 아팠던 동생 정균이는 다행히 단순 장염 판정을 받았다.

이제 6학년이 되는 큰 조카는 패러세일링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4학년이 되는 작은 조카는 해변 식당, 마냐냐에서 먹은 브리또와 망고쉐이크가 최고라고 했다. 

미니 마우스 홀릭 다섯 살 조카는 그동안 까맣게 그을려 정말 아프리카 공주가 되었다. 


나는 이번 여행을 계기로 여행과 사람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사흘이 지나도 여독이 풀리지 않는 유난히 힘든 여행이었지만, 
아이들과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었고, 정신없는 속에서도 나름 즐거움을 찾고 생각할 기회를 가졌으니 그걸로 충분히 만족한다.

부족한 그린데이 투어를 믿고 지지해 주신 시누이께 감사를... :)
추워도 내 집이 있어 감사함을 느끼는 오후다. 

###

100년만에 Daum View Pick, 감사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