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시간속으로 떠난 가을여행, 경주 남산 '동남산 가는 길'
- 센티멘탈 여행기/한국 구석구석
- 2014. 11. 7. 07:42
언제였더라...?
어렴풋하게 학창시절 수학여행의 추억이 떠오르긴 하는데, 기억나는 건 실제 내가 본 건지 백과사전 속 사진인지 헛갈리는 석굴암, 불국사, 첨성대 뿐. 그 주변에 뭐가 있었는지, 심지어는 단체사진을 어디에서 찍었는지 조차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엄청나게 큰 무덤과 장난기 많았던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를 뿐. 뽀얗게 먼지 쌓인 졸업앨범 세 권과 어릴적 사진들을 꺼내 보고서야 그게 고 1때라는 걸 알았다.
차 없이 경주로~
▲ 창 밖에는 어느새 황금 들판이 넘실넘실~
까마득한 수학여행을 기억을 더듬으며 경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시끌벅적한 관광버스 대신 품위있는 KTX를 탔지만 마음만은 생기발랄 여고생. 오랜만에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 더 설렜다고 하면 아이들이 서운해 할까? 우아하게 커피 한 잔에 고택 이야기가 실린 잡지 한 권을 끝내니 어느덧 신경주역에 도착했다.
▲ 서울에서 경주까지는 KTX로 2시간 반. 바로 앞에 주요 유적지로 가는 버스 정류장이 있어 차 없이도 여행할 수 있다.
이번 여행의 컨셉은 '차 없이 떠나는 주말여행'.
'차 없이 떠나는 주말여행 코스북'을 쓴 작가들과 함께 열차와 버스, 튼튼한 두 다리(!)로 경주 남산을 누비는 일정이 계획되어 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 차 없이 장거리 여행은 상상해 본적이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해외여행은 대부분 대중교통으로 잘만 다니지 않았던가? 시간이 흐를 수록 함께 다니기도 훨씬 수월하고, 짐도 준 것이 사실. 게다가 아이들은 자동차보다 기차와 버스를 더 좋아한다. 이 책에는 경주 같은 장거리 여행지 뿐 아니라 인천, 수원, 춘천 등 당일여행이 가능한 서울 근교 여행지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당장은 가까운 곳이나 현지에 차를 세워두고 다닐 수 있는 코스와 스팟 정보를 참고하고, 두 아이가 각자의 배낭을 자신들이 책임질 수 있는 때가 되면 이 책에 나온 7일간의 추천코스대로 여행을 떠나봐도 좋을 것 같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경주 동남산 가는 길
▲ 복원중인 월정교(月精橋).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이 깃든 터로 달밤에 거닐면 꽤 로맨틱할 것 같다. 맞은편에는 일정교(日精橋)가 있다.
그런데, 경주가 아니라 경주 남산이라고?
경주는 사방이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그중에서도 남쪽에 있는 '남산'은 높이가 겨우 500m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작은 산은 경주에서 가장 많은 유물과 볼거리, 이야기를 가진 곳이다.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 전성기의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어 산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될 정도~! 지금까지 보행로가 없어 아는 사람들만 찾아가는 명소였지만, 올 6월부터 '동남산 가는 길'이 개방되어 경주 남산의 동쪽 유적지를 한 번에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 오오~ 이게 바로 '삼시 세끼'에 나온 그.. 수수??
동남산 가는 길은 월정교에서 출발해 불곡석불좌상~경북산림환경연구원~정강왕릉~통일전~염불사지석탑으로 8km 가량 이어진다. 산이라고 해서 나는 비장하게 등산화를 신고 나섰는데, 동네 어귀와 황토길, 때로는 도롯가를 걷는 나름 경주 둘레길이었다.
이 길은 참 좋다. 곡식과 채소가 여물어가는 논밭을 끼고, 과거와 공존하며 살아가는 마을의 삶을 볼 수 있다.
때로는 보행로에 넣어놓은 알곡 때문에 어디로 걸어야 하는 건지 헤매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정겨운 풍경이었다.
일행이 멀어지는 줄도 모르고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경주의 시골 풍경에 감탄하며 사진찍기에 열을 올렸다.
▲ 중간마다 아기자기 맑은 계곡과 작은 폭포가 있는 경주 동남산 산책로
바위마다 불상이?! 산 자체가 신앙, 경주 남산
▲ 선덕여왕을 모델로 했다는 전설이 있는 '경주 남산 불곡 마애 여래좌상 (보물 제198호)'
산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오르니 '경주 남산 불곡 마애 여래좌상' 표지판이 보이고, 바위를 파놓은 무지개 모양의 굴 안에 미소를 띈 석불이 앉아있다. 할머니의 모습을 한 이 부처는 그 모습이 평온하고 자애로워 할매부처라고도 한단다. 신라 석불로는 아주 이른 시기인 7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선덕여왕을 모델로 했다는 전설이 있다.
걸어왔던 경주의 시골마을과 무척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우러진 숲을 배경으로 넉넉한 미소의 할머니 부처가 바위 안에 한결같이 앉아있다. 신라인들은 바위에 부처를 조각하는 과정을 '돌 속에 숨어있는 부처를 정으로 찾아낸다'라고 표현 했다는데, 정말 언제나 이곳에 있었을 것만 같이 자연스럽고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 사철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한 옥룡암(玉龍庵)의 가을 풍경
▲ 거대한 바위에 환상적인 부처의 세계를 새긴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보물201호)'
▲ 탑 사이에 있는 석가부처(좌), 작은 바위에 새겨진 동자승(우)
다시 들판을 지나 탑골마을에 이르니 계곡 중턱에 옥룡암이라는 절이 있고, 절 뒤편 거대한 바위에서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보물201호)'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바위 사방에는 약함을 든 약사 부처와 탑 사이에 있는 석가부처, 날개달린 비천상과 승천중인 아미타 부처 등 불교계의 핵심 부처와 승려, 종, 나무 등 34점의 불교군상이 골고루 새겨져 있다. '탑골 부처바위'라고도 불리는데, 하나하나 뜯어보니 천상의 세계를 표현한듯 환상적인 조각이 무척 멋졌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큰 바위 뿐 아니라 작은 바위에도 동자승 등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 앞에 누군가가 쌓아놓은 돌탑으로 인해 이곳이 그저 옛 유적지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곳임이 증명되고 있었다. 가장 자연스러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 바로 이게 경주 남산의 매력이 아닐까?
품격이 다르다! 경주의 가을 풍경
다시 산을 내려와 마을로 걷는 길, 가로수 대신 내 키의 세 배쯤 되어 보이는 감나무와 까만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오가피 나무 등 다양한 과실수와 으리으리한 기와집들이 우리를 맞는다. 신라 시대 전성기에 경주는 집집마다 기와를 얹고, 숯으로 쌀밥을 해먹었다더니, 이곳의 가을은 여느 시골 풍경과는 다른 품격이 있었다.
누가 따갈까 무서워 익기도 전에 수확을 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까치들까지 요기를 할 수 있도록 넉넉하게 감을 남겨두었다. 어릴 때부터 높은 곳에 있는 따지 못하는 감을 '까치밥'이라고 하는 것을 듣긴 했는데, 서울 촌놈이라 실제로 까치가 감을 쪼아먹는 모습을 보고 무척 신기해 한참을 바라봤다.
분지 지형이라 사방이 평야인 경주에서는 황금 나락의 물결도 급이 달랐다. 그저 추수하는 곁을 겉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한 게 아흔 아홉칸 대가집 주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나무와 단풍나무, 억새, 그리고 김장배추가 사이좋게 자라는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사를 연발하다가 소나무 숲길로 접어들었다.
짙은 솔향을 맡으며 안개낀 산 속으로 걸어들어가니 아무렇지도 않게 왕릉이 있다. 한때 시대를 주름잡던 왕들도 남산의 무덤 속으로... 하지만 이렇게 후대까지 부러 찾아와주는 이들이 많으니 그 속에서도 행복하시지 않을까?
▲ 쥐와 까마귀로 대표되는 이야기로 유명한 '서출지', 연꽃이 피었을때 경치가 절정을 이룬다지만 가을 경치도 무척 멋졌다.
조상님, 많이 놀라셨죠? 경주에 대한 편견을 깨다.
▲ 남산리 사지 쌍탑(양피사지)
'차 없이 떠나는 주말여행 코스북' 저자를 포함해 열 네명의 여자들과 자칭 '아줌마'라 불러달라는 한 남자가 경주 남산을 누볐다. 1박 2일로 떠나 하루 코스의 막바지인 남산리 사지 쌍탑에 이르러니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가까워 졌다. 오래 걸어 좀 지치기도 하고, 뭔가 더 재미난 것이 없을까 궁리하던 차에 누군가가 '점프샷'을 제안했다.
출판사 에디터도 살신하는 마음으로 동참했다. 두 개의 탑과 기와집을 사이에 두고 장풍으로 흩어지는 꽃처녀들의 모습이라니. ㅎㅎㅎ 이 어찌 경주에 어울리는 풍경이라 하지 않을 수가~! 경주에서 늘 경건하기만 하란 법 있나? 조상님께는 쪼끔 죄송했지만, 뭐 이 정도는 애교로 용서해 주실 거라 믿는다.
저녁은 경주에서 가장 인기있는 한정식집이라는 '도솔마을'로~ 종일 걸어 무척 배가 고팠던 터라 저녁상이 기대됐다.
한옥마을 같은 분위기의 옛 기와집에서 받은 잘 차려진 경상도식 백반과 모듬전 한 상~! 누가 경상도 음식이 맛없다고 했던가? 들깨향 가득한 미역국, 진한 양념의 닭볶음탕, 모듬전 한쪽에 곱게 놓인 돔베고기(상어고기) 등 지극히 경상도 스러운 음식을 맛보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그런데, 맛이 어딘가 익숙한데... 맞다. 내 시어머니의 고향이 경주라고 하셨지.
아, 신라의 달밤~!
▲ 첨성대
막걸리도 한 잔 했겠다. 이제부터는 제대로 신라의 풍류를 즐길 차례. 우리는 수학여행의 추억을 되짚으며 첨성대로, 안압지로 불렸던 월지로 걸음을 옮기며 제대로 경주의 야경을 즐겼다.
▲ 월지
아, 신라의 밤이여~!
이렇게 좋은 데, 나는 왜 이제야 이곳을 찾았을까?
### 1박 2일 경주 남산 여행기, 2편으로 이어집니다. ^^
* 이 여행은 '차없이 떠나는 주말여행 코스북' 독자와 블로거가 함께 떠난 팸투어로 경주 남산 연구소와 도서출판 길벗의 후원으로 다녀왔습니다.
[여행 Tip]
경주 남산 연구소 유적답사 (홈페이지에서 다양한 코스 참조)
일시: 토요일 13:30 / 일,공휴일 09:30 / 여름방학중 매일 09:30
참가 신청: 참가 전일까지 (코스별 선착순 50명)
http://www.kjnamsan.org/
도솔마을 (한정식)
주소: 경북 경주시 황남동 71-2
전화: 054-748-9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