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묵칼레, 오즈귤 호텔의 흔적을 찾아서...

겉보기에는 잘나가는 방송작가이지만 늘 마음 한구석에 터지지 않는 풍선을 밟고 살던 미노는 어느날 갑자기 1년간의 세계일주에 나선다.
4개월간 느릿느릿 유럽을 여행하던 그녀의 걸음은 어느 가을, 터키의 작은 시골마을인 '파묵칼레'멈추게 된다.
납치되듯 묵게 된 오즈귤 호텔에서 여행의 나머지 기간인 7개월을 살게 된 그녀. 그녀를 붙잡은 건 내츄럴 본 생날라리 마초 사장 나짐이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 때문에 매일이 티격태격 싸움의 연속이지만, 그 속에서 로맨스를 키워나가는 미노와 나짐, 그리고 그들의 주변 이야기.
여행자의 시선이 아닌 이방인 생활자로서의 생생한, 하지만 덤덤하게 풀어낸 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마치 내 주변의 일상처럼 느껴진다.

'수상한 매력이 있는 나라 터키, 240+1'. 바로 내 터키여행의 가장 강력한 계기 중 하나인 책 이야기다.

▲ 수상한 매력이 있는 나라 터키를 계기로 작가 미노의 팬이 되어 그녀가 쓴 몇 권의 책을 가지고 있다.

다시금 케케묵은 터키 이야기를 하나 꺼내보려고 한다.
언젠가는 꼭 털어놓고 싶었던 이야기중 하나였기에 긴 장마를 핑계로 (그래서 우울한 이야기 하나 쯤은 더 해도 좋겠지라는 생각으로) 오랜 사진폴더를 뒤적거려 몇 장의 사진을 찾아냈다.

새벽, 파묵칼레로 납치되다.



어느 봄날 새벽, 카파도키아에서 야간 고속버스를 타고 10시간을 꼬박 달려 파묵칼레에 도착했다. 사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데니즐리 오토가르'였다. 파묵칼레는 이곳에서 차로 30분 정도를 더 가야 하는 작은 시골마을. 하지만 여느 시골이 그렇 듯 버스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럴때는 보통 고속버스회사에서 마을 단위로 세르비스(서비스 버스)를 운영해 손님들을 목적지까지 실어나르곤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서비스를 기대하기 어렵다. 오직 관광수입으로만 먹고사는 이 마을 사람들이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관광객들을 그야말로 '납치'하기 때문이다.
  

▲ 데니즐리 오토가르에서 납치되어 내린 곳은 파묵칼레의 '칼레 호텔(KALE HOTEL)'.

납치된 여행자들은 보통 파묵칼레의 특정 호텔 앞에 내리게 된다. 호텔에서 운영하는 세르비스이기 때문이다. 내가 내린 곳은 '칼레 호텔'이라는 곳이었다. 
미노도 나짐이 운전하는 미니버스에 몸을 싣고 이렇게 오즈귤 호텔을 처음 만났겠구나... 생각하니 마치 내가 책 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한 듯 흥분이 되었다.

선량한(?) 사람들은 보통 이곳에서 하루를 묵거나 여행상품을 계약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책으로 상황을 접한 나는 뒤통수로 꽂히는 칼레 호텔 사장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 하고 재빨리 석회호수로 걸음을 옮겼다.



곧 비가 쏟아질것 같은 흐린 날이었지만 듣던대로 파묵칼레의 석회 호수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파묵칼레 석회붕, 맨발로 걷다


▲ 함께 납치당한 인연으로 한국인 남학생 두 명과 하루를 함께 하기로 했다.

그러나 가까이 보니 기대했던 새하얀 석회붕의 모습은 아니다. 눈 쌓인 스키장 같이 깨끗한 모습을 기대했던 나는 무척 실망했다. 관광객이 늘면서 인근 호텔들이 너무 많은 온천수를 뽑아 쓴 탓에 석회붕의 물웅덩이가 말라가고 있다고 했다. 고육지책으로 터키 정부는 산꼭대기 온천수가 나오는 입구를 모두 막아놓고 한여름 성수기나 단체 관광객이 몰릴 때만 온천수를 흘려보내는데, 그래서인지 내가 찾은 비수기에는 파묵칼레의 절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다. 



남아있는 석회붕이라도 지켜보려는 노력인지, 파묵칼레에서는 맨발 입장만 가능하다. 나도 양 손에 신발을 벗어들고, 석회붕 위를 걸어 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보드라운 감촉이 좋다. 아직 말라붙지 않은 고운 석회모래가 온천수에 엉겨붙어 걸을 때마다 진흙처럼 미끈하고 폭신하게 밟힌다.
걷다보니 물이 흐르는 곳이 있어 바짓단을 걷고 따뜻한 온천수의 기운을 느껴보기도 했다. 역시,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진리.



얼마나 걸어 올랐을까? 숨이 가빠올 무렵 뒤를 돌아보니 와~! 그림엽서에서 봤던 익숙한 파묵칼레의 절경이 펼쳐진다.
비록 기대하던 모습은 아니었지만, 책 속의 나짐이 관광객들을 모아 한밤중에 경찰 몰래 온천욕을 하던 장면을 상상하기에는 충분했다.  


고대 로마제국의 쇠락한 영광, 히에라폴리스



하얀 석회산 끝에는 고대 로마인들의 도시, 히에라 폴리스가 있다. 기원전 2세기 페르가몬 왕조의 터전인 이곳은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성스러운 도시를 뜻하는 ‘히에라폴리스’로 불렸다. 한때 인구 8만에 이르는 큰 도시였으나 전쟁으로 인해 11세기 이후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원형극장, 공동묘지, 목욕탕 등이 넓게 흩어져 있는 이곳은 둘러보는 것 만으로도 옛 영광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히에라폴리스는 특히 '온천 명소'로 유명했는데, 클레오파트라가 수영을 즐겼다는 전설이 있다. 온천욕을 하던 대중 목욕탕은 현태에도 '하맘'이라고 불리며 터키 곳곳에 대리석 기둥으로 그 형태를 재현한 곳이 많다.

▲ 도미티안 문, 이 문을 지나면 긴 프론티누스 거리가 나온다. 화려한 옛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

▲ 웅장한 원형극장의 무대는 별도의 음향 장치 없이도 소리가 극장 전체로 울리는 효과를 낸다. 한무리의 학생들이 열심히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을 보니 우리네 수학여행 풍경이 떠올라 정겨웠다.   


미노와 나짐, 오즈귤 호텔의 흔적을 찾아서...


▲ 한적한 파묵칼레 거리 풍경. 곳곳에 걸려있는 한국어 플래카드를 보면 이곳에 얼마나 많은 한국인 관광객이 오가는지 추측해 볼 수 있다.
유럽 관광객들이 훑고 지나간 관광지를 한국인 관광객들이 다시 채운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현장을 직접 보는 것 같아 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돌아온 시내. 어느새 날이 맑게 개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칼레 호텔의 사장과 마주쳤다. 
그의 끈질긴 호객행위가 귀찮기도, 무섭기도 했고, 마침 점심 때가 되었기에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식당을 하나 추천 받았다.  



음식은 의외로 괜찮았다. 즉석에서 반죽을 해 빚어주는 괴즐레메에 나름 매콤한 고춧가루를 넣어 한국식 입맞을 맞추려고 노력한 닭고기 볶음밥, 그리고 터키식 장아찌인 두슈까지. 관광지 물가치고는 가격도 적당하고, 무엇보다 나는 동생같은 두 친구와 함께였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누나, 이제 어디로 갈 거에요?"
"저녁에 셀축으로 이동할거야. 그 때까지는 좀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
"어디? 어차피 우리도 오후에는 무계획인데, 보디가드해 줄까요?"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곳곳에 폐허가 되어버린 호텔과 문 닫은 나이트 클럽들이 눈에 띈다.
쇠락한 히에라폴리스처럼 황량한 길을 걸으며 나는 고마운 그들에게 미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큰 길이 내다보이는 호텔의 2층 레스토랑 앞에는 뽕나무 덩쿨이 우거진 작은 마당이 있다.
4월의 상쾌한 아침 햇살을 즐기기 위해 우리는 피크닉을 온 것 마냥 선글라스를 쓰고 뽕나무 덩굴 아래 아침 밥상을 차린다.
봄이 시작되면서 이렇게 매일 오주귤 호텔엔 2시간이 넘도록 세상에서 가장 긴 아침 식사가 계속된다."

- P200, 이상한 나라 터키에 대한 문화 보고서. 2004년 봄, 파묵칼레 中


봄날 오후, 우리는 뽕나무 덩쿨이 우거진 작은 마당이 있는 오즈귤 호텔을 찾아 나섰다.
어디선가 오즈귤이라는 이름을 가진 간판이 나타날 것만 같아 함께 거리의 크고 작은 간판들을 샅샅이 훑었다.
간혹 마주치는 농부들에게는 책 속의 사진을 보여주며 물었다.

하지만 터키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우리와 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
대강의 위치도 모르면서 단지 '작은 시골마을이니 누구든 알고 있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믿음 하나만 가지고 찾아나선 것 자체가 무리였다.

몇 차례의 외면 끝에 겨우 내 물음에 귀기울여주는 아주머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사진을 보여주며 '오즈귤 호텔'과 '나짐'에 대해 물었다. 그녀들은 이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바디랭귀지로 호텔이 없다는 이야기만을 반복한다. 리모델링을 해서 이름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파묵칼레에 있는 수많은 호텔처럼 그냥 주인 없이 버려져 있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이야기만 하면 어두운 표정으로 변하는 그들에게 더이상 질문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데......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이제 호텔이 없다는 것을.

그날 이후 나는 나짐을 만날 수 없는 이상한 꿈 속에 살고 있다. 언젠가 이 나쁜 꿈에서 깨어나면 나는 다시 나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P267, 나짐의 마지막 이야기 中


7개월간의 파묵칼레 생활을 마치고 저자 미노는 다시 방송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후에도 가끔 나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싸울사람이 없어 심심하다는 그의 투정이 반복되기를 9개월여...

"18일로 비행기표 예약했어, 기다려." 

한국에 오면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나짐을 데리고 어디를 가면 좋을지 궁리하느라 행복했다는 미노.
그러나 이틀 후... 나짐은 손님을 태우고 오토가르로 가던 중 한 음주운전자의 차에 부딪혀... 죽었다.
차에는 5명이 타고 있었는데, 오직 운전자 옆자리에 앉은 나짐만 죽었단다.
사고 소식을 듣고 그녀가 터키를 찾았을 때, 나짐은 이미 아버지 곁에 묻혀있었다.
사고가 나기 석달 전, 나짐은 그의 아버지가 아쉽게 남의 손에 넘겨야 했던 여행사를 다시 인수했다. 
파묵칼레에서 제일 크고 폼나는 사무실을 냈다며 그는 행복해 했다.

 

나는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책의 마지막 장에 적힌 그의 죽음을 부정하기라도 했던 걸까?
아니면 오즈귤 호텔의 터라도 찾아 마치 내가 책 속의 미노라도 된 듯 그곳에서 눈물을 흘리고 싶었던 걸까?
작가가 빠져들 수 밖에 없었던 시골마을을 정서를, 그 공기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끼며 순간 혹시 내 물음이 그들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미노가 책에서 언급한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카페'에서 보드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엿보며 상상 속 나짐을 만난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며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도, 책 속의 흔적을 찾아 나와 함께 걸어 준 고마운 친구들에게 커피를 한 잔 샀다.
나는 상에서 가장 맛없는 카페라떼를 마셨다. 사실 커피라고는 진하고 독해 걸쭉하기까지한 '터키쉬 커피'와 인스턴트 '네스카페'가 전부인 이 시골마을에서 억지로 카페라떼를 주문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그래도 그 순간 만큼은 내가 좋아하는 카페라떼를 주문해 마시며 그렇게라도 위안을 받고 싶었다.
생전 처음보는 생크림 듬뿍 올라간 미지근한 카페라떼에 각설탕을 모조리 털어 넣으며 내 안의 오즈귤 호텔도 그렇게 떠나보냈다.   

그날 저녁... 나는 결국 칼레호텔의 사장에게서 사기를 당하고야 말았다. 
그에게서 고속 대형버스 '메트로' 티켓을 산 나는 터미널에서 가서야 그것이 메트로가 아닌 'EGE KOOP'이라는 미니버스 티켓인 것을 알게 되었다.
함께 버스에 탄 일본인 여행자는 같은 곳에서 심지어 내가 지불한 두 배의 가격으로 티켓을 샀다고 한다.

덜컹거리는 낡은 버스에 몸을 싣고 셀축으로 가는 길. 
상처뿐인 나만의 파묵칼레 상상여행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그래도 함께 길을 나서준 친구들이 있었기에 한낱 꿈이 아닌 추억으로 남았다.
떠나는 길에는 보름의 터키 여행중 가장 예쁜 노을을 만날 수 있었기에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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