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름다운 길 따라 도착한 남해 최고의 절경, 다랭이 마을

국내여행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내 차를 몰고 여유롭게 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서울을 어느 정도만 벗어나면 만날 수 있는 한가로운 풍경, 국도를 따라 골목골목 사람 사는 동네를 누비는 재미, 예상치 못한 곳에서 뜻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그 즐거움은 배가 된다.

1024번 국도를 따라 가천 다랭이 마을로 향하는 길.

1024번 도로는 남해안을 따라 달리는 해안도로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하나로 선정된 곳이다. 특히 해 질 무렵이 아름다워 '낙조가 아름다운 길'로 유명한데, 길을 따라 천천히 달리다 보면 이렇게 천의 얼굴을 가진 남해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굳이 다랭이 마을까지 가지 않아도 섬의 비탈진 곳에선 어디서나 이렇게 크고 작은 다랑이 논을 만날 수 있다. 바다와 맞닿은 곳에는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방품림을 심고, 층층이 논을 일궈 모를 내놓은 그 모습이 잘 꾸민 정원처럼 참 가지런하다. 다랭이는 '다랑이'라는 단어의 사투리로 '산골짜기의 비탈진 곳 따위에 있는 계단식으로 된 좁고 긴 논배미'라는 뜻이 있다.'계단식'보다는 '좁고 긴'이라는 의미가 더 강한 이 논에는 정말 해안선을 따라 굽이굽이 손바닥만 한 땅에까지 알뜰하게 모가 심겨 있었다. 

그렇게 20여분을 달렸을까? 산비탈을 따라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이 시작되었다. 왠지 섬의 끝이 가까워진 느낌. 

그리고 모퉁이를 돌자 만나는 절경... '아~!'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좁은 산길이지만 잠시 차를 세우고 층층이 흘러내린 논밭과 바위로 뒤덮인 해안, 멀리 꿈처럼 김만중의 유배지였던 '노도'도 보인다. 그 풍경이 어찌나 감동적인지, 차마 말로 형언할 수 없다. 사진으로 보는 풍경과 차 안에서 보는 풍경, 차에서 내려 비릿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보는 풍경은 정말 다르다. 감히 비교할 수 없다.  

놓치고 싶지 않은 이 멋진 풍광을 기억해두려고 조금씩 몸을 돌려 사진을 찍어 붙여봤는데, 영... 감이 안 사네.

농지가 부족했던 마을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산비탈을 깎고 돌멩이를 층층이 쌓아 석축을 만들어 논을 일궜다고 한다. 이렇게 계단식으로 만든 곡선형태의 논이 무려 100여 층에 이른다. 사면이 바다인 섬마을인데, 척박한 농지를 개간하는 것보다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삶이 더 편하지 않았을 까란 생각이 드는 대목. 하지만 해안은 바위가 많고 바람과 물살이 세 배를 대기가 어렵다고 한다.

해안선을 따라 굽이굽이 늘어선 계단식 논은 기계가 들어가 움직이기 어려워 손으로 일일이 모내기를 해야 한다. 물을 대기 위해 평평하게 층을 낸 다랭이 논이지만, 요즘은 관리가 어렵고 수익이 많이 나지 않아 점차 밭으로 개간해 마늘이나 파를 심고 있어 그 형태가 조금씩 변하고 있단다. 처음 이곳을 찾은 여행자로서 좀 아쉬운 부분이지만, 다랭이 논 자체도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일궈 생겨난 것이니 필요에 따른 변화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마을 어귀에 차를 세우고(어디에도 표지판이 있진 않지만, 관광객용 주차장으로 보이는 곳이 있다.) 다랭이 논 가까이 가보기로 했다. 관광지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깨끗하게 정돈된 마을엔 민박집도 꽤 있어 여느 시골 풍경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

요즘은 시골 마을에 벽화를 그리는 게 트랜드인가보다. 가끔 보면 생뚱맞은 어린 왕자를 그려넣는 등 마을의 느낌과 동떨어진 그림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경우가 있는데, 다랭이 마을의 벽화는 과하지 않아 좋다. 쟁기 끄는 소, 추수하는 농부의 선한 미소 등 마을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 정겹다. 색감이나 표현의 수준도 나쁘지 않다.

볕 좋은 날 빨래를 너는 시골 아낙.

파종할 파의 씨앗을 준비하는 정겨운 풍경은 골목골목 마을을 가로질러 걸어야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밥 무덤, 암수바위 같은 관광지도 돌아보고, 좀 덥다 싶으면 막걸릿집 평상에 앉아 김치를 안주 삼아 시골 할머니가 직접 빚었다는 칼칼한 유자잎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켜도 좋겠지.

이렇게 걷다 보면 어느덧 해안으로 이어진 산책로를 만나게 된다. 난 또 탐스럽게 피어난 수국 앞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이제는 관광지가 되어버린 이 마을의 주민들은 바다 가까운 다랭이 논에 새로이 허브를 심기 시작했다. 허브길 초입에는 수국을 심고, 갖가지 향 좋은 허브를 길러 내 차와 허브를 팔기도 한다.

밭을 손질하는 농사꾼의 정성과 은은한 허브향이 좋은 기억으로 남는 이곳의 풍경. 
 
혼자 앞장서 가다가 '아빠~'하고 달려오는 딸내미의 얼굴에도 웃음이 한가득이다. 매일 아랫집 아줌마 올라온다며 아이가 뛸 때마다 살금살금 걸어 다니라고 혼을 냈는데, 이렇게 자연 속에서 아이가 맘껏 뛰고 웃는 모습을 보니 내가 더 즐겁다.

바다가 있는 쪽으로 더 내려가면 해안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길이 나타난다. 갯바위까지 내려갈 수 있어 바다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바닥이 보일만큼 투명한 물빛이 아름다우니 산책삼아 가보면 좋다. 

여기까지 돌아보고 난 감상. '우리나라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니...!' 해외여행만 고집하던 내가 참 부끄럽다. 언덕에서 바다로 굽이굽이 이어지는 계단식 논, 바다와 맞닿은 곳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쌓인 바위 섬들이 어우러져 기막힌 장관을 연출하는 이곳. 감히 비교하자면 제주의 우도에서 느낀 감흥 비슷하달까? 과연 남해 최고의 절경이라 부를 만 하다. 


[여행 Tip] 가천 다랭이 논
· 명승 제 15호. 남해 가천마을 다랑이 논
· 주소: 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 777번지 등 (남해읍에서 20분 거리)
·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 바다와 맞닿은 다랭이논, 암수바위, 설흘산 등산로, 유자 막걸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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