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따고 한우 굽고, 영월 단풍여행

남편이 육아휴직을 한 후, 달라진 점 중 하나는 세상의 변화에 둔감해졌다는 것이다. 

대신, 계절의 변화에 민감해졌다. 여행에 미친 우리에게 올 한해는 떠나기 좋은 계절과 그렇지 않은 계절로 구분되고 있다.


설악산 단풍소식이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던 지난 주말, 차를 몰고 강원도 영월로 향했다.
단풍이 무르익을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떠나고 싶은 마음을 참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서울 근교 나들이나 한강 산책은 간간히 했지만, 숙박을 겸한 여행은 지난 8월에 다녀온 태국 이후 참 오랜만이었다.

만산홍엽 물든 계곡과 금빛 반짝이는 억새를 상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 치악산 휴게소에서 영월 지도를 함께 보는 가족. 영월에는 장릉, 청령포, 고씨동굴, 잣봉, 어라연, 선암마을 한반도 지형, 선돌, 별마로천문대 등 볼거리가 많다. 차로 한 시간 반 남짓 더 달리면 정선, 태백산에 닿을 수 있다. 



첫 목적지는 영월 다하누촌. 마침 점심시간이기도 했고, '다하누 곰탕 & 쌍섶다리 문화축제'가 열린다고 해서 부러 들렀다. 그러나 축제가 열리는 중앙광장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일요일이라 관광객이 많이 빠진 상황이었고, 축제 마지막 날이라 그런 것 같았다. 오랜만에 꽃등심 한번 제대로 썰어주겠다며 전의를 다지던 나는 한우 45% 할인 행사마저 끝나버려 무척 아쉬웠다.



다행히 커다란 가마솥에 뽀얗게 우려낸 곰탕을 국수에 말아주는 시식행사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종이컵 한가득 담긴 삶은 소면에 곰탕 국물을 한 국자 말고, 굵은 소금을 살짝 뿌리면 시원한 곰탕국수가 완성~! 눈치없는 아이들이 두 컵을 연달아 먹고 또 달라고 졸라도 인심좋은 청년은 마음껏 드시라며 싫은 기색이 없었다. 건너편에선 강원도 삶은 감자와 영월 막걸리도 무료로 제공되고 있었는데, 맘만 먹으면 여기서 한 끼를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스티브와 나는 오랜만에 한우 소고기를 구웠다. 촌스럽게도 코스트코 호주산 척아이롤이 최고인줄 알았던 우리에게 한우 숯불구이의 맛은 완전 신세계~! 비록 투플러스 꽃등심은 아니었지만, 저렴한 우리 입맛에는 임금의 식탁이 따로 없었다.



고기집 뒤로는 아담한 마을이 있었다. 집집마다 나물이며 감, 깨를 널어 말리는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할머니의 거친 손처럼 푸근한 한국의 가을 풍경이랄까?



학교 앞 양지바른 화단에는 꽃대신 은행잎이 한창이었다. 



선암마을 한반도 지형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사과따기 체험' 플랙카드를 발견해 들른 과수원. 진행방향의 반대쪽에 있었지만 '미래를 담보로 현재의 즐거움을 미루지 않는다.'는 신조를 가진 스티브가 과감하게 (불법)유턴을 감행했다...; 즉흥적인 결정이었지만, 가제트의 팔처럼 길다란 막대를 가지고 사과를 따는 체험은 이번 여행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즐거웠던 기억으로 손꼽힌다.




뜻하지 않은 이벤트로 해질 무렵에 도착한 선암마을 한반도 지형. 자료 사진에서 보던 푸른 모습과는 달리, 가을 빛으로 물든 섬이 인상적이었다.  




영월 오일장이 서는 날이었으나, 시장은 가자마자 파장. 



아쉬운 마음에 영월 서부시장에 들러 유명하다는 메밀전병과 배추전, 수수 부꾸미, 올챙이 국수에 영월동강 막걸리를 곁들여 저녁을 해결했다. 



다음날 아침부터는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2박 3일을 계획하고 내려왔는데, 돌아가는 날까지 100ml이상의 비가 내렸다. 운무에 휩싸인 동강과 절벽, 오색으로 물들어가는 나무들이 무척 아름다웠지만, 단풍 구경은 여기까지였다. 점점 내려오는 안개에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됐다. ㅠㅠ  


우뚝 솟은 돌기둥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동강 풍경이 아름답다는 선돌. 아무리 전망대 가까이 가봐도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남편은 이 사진에 '비광'이라는 제목을 붙였다는. --;


마침 월요일이라 근처 박물관도 모두 문을 닫았다. 고민끝에 '라디오 스타' 촬영지라는 '청록 다방'을 찾았다. 다행히 넓지 않은 영월 시내 한복판에 있어 발견하기 어렵지 않았다. 



연륜이 느껴지는 찻잔을 앞에 두고 마치 동네 사랑방 같은 다방 분위기에 젖었다.



아이와 함께인 우리를 보고는 기꺼이 난롯가 자리를 내어 준 동네 사람들. 손사래를 치다가 슬그머니 앉아보니 테이블에 '중훈'이라는 싸인이 있었다. 바로 이 테이블에서 라디오 스타를 찍었다고~! 보글보글 타닥타닥, 뒤통수로 들려오는 TV뉴스를 음악삼아 마치 시간 여행을 떠나온 듯 한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이후 시간은 리조트 스파에서 해가 질 때까지 놀았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달리 할 것이 없었기 때문, 그나마 온수가 나오는 물놀이장이 근처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돌아오는 날까지 끊임없이 내리던 비. 마지막 날에는 단종 유배지라는 청령포로 향했다. 전날, 아무도 없었던 선돌과는 다르게 관광객도 꽤 보였고, 배도 운행중이었다. 자갈, 모래 바닥에 물이 고여 걷기 어려웠지만 아이들은 오히려 신발이 다 젖도록 첨벙거리며 좋아했다. 진아가 옛 생활상에 흥미를 보이며 떠나고 싶지 않아해서 힘들지만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냥 가기 아쉬워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꼬불꼬불 별마로 천문대에 올랐다. 



안개 걷힌 청령포를 보며 내심 기대해 봤지만... 산 정상으로 오를 수록 더 짙게 차오르는 안개를 감당할 수 없어 결국 천문대 건물만 보고 그냥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여행은 언제나 나의 일방적인 선택'이라고 했던가?' 

첫 날 이후로는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아이들과 함께 아름다운 내 나라의 가을을 느낄 수 있었던 이번 여행.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을 이대로 보낼 수 없어, 또 다른 단풍여행을 계획하기로 했다. 


다음은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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