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한 달, 아이와 떠난 서핑여행 스케치
- 센티멘탈 여행기/한 달쯤, 발리
- 2015. 2. 23. 07:00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스티브와 얘기했다.
이제 남은 건 '서핑(Surfing)'뿐이라며. 다음 여행지는 발리의 꾸따비치가 되어야 하는 거냐며...
며칠 후, 스티브는 문화센터 수영 클래스에 등록했다.
며칠 후, 스티브는 보트 조종 학원에 등록해 2급 자격증을 땄다.
요즘 스티브는 1급 보트 조종 자격증을 공부 중이다.
요즘 양가 가족은 우리가 섬으로 내려가 낚시 배를 몰며 전복을 딸 건지 궁금해한다.
- 2014년 9월 15일에 남긴 글, '다이버의 섬, 꼬따오로 떠난 23박 24일 태국여행 스케치' 중에서
남은 버킷 리스트 하나, 서핑
▲ 엄마의 서핑, 꾸따비치에 웬 해녀가...;
마음은 먹었지만, 사실 발리행을 결정하는 건 쉽지 않았다. 욕심 때문이었다.
어쩌면 우리 가족의 마지막 장기 해외여행이 될 수도 있는데, 흔히 가는 휴양지 말고 평소 꿈꾸던 여행지를 한번 가봐야 하지 않겠냐는 거였다.
뉴질랜드 남섬, 캐나다 옐로나이프, 중국 샹그릴라, 요르단 페트라 같은 데 말이다.
서핑을 배우고 싶다면 파도 좋은 미서부나 하와이, 호주도 있는데, 왜 하필 발리인가...?!
▲ 아빠의 서핑 첫날, 꾸따비치에서. 같은 바다라도 비가 온 후와 전이 이렇게 다르다.
현실과 로망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이에 일감이 밀려들었다.
나는 12월까지 꼼짝없이 출판사의 편집 일정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스티브의 휴직은 1월 20일까지.
가끔 근교 나들이를 다니긴 했지만 이대로 지내다가는 벼르던 '마지막(?)' 장기여행을 떠나지 못할 게 뻔했다.
방법은 하나, 항공권부터 지르는 것~!
기간은 스티브의 휴직이 끝나는 날부터 복귀 준비 기간을 고려해 역순으로 산정했다. (2014/12/16~2015/1/15)
목적지는 끝까지 하와이와 호주, 발리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어디선가 본 '호주에서 서프보드 빌리는 값이면 발리에서 강습을 받는다'라는 글에 혹해 발리로 결정했다. 크리스마스를 낀 연말 성수기에 가뜩이나 물가 비싼 미국, 호주에 한 달이나 머무는 건 4인 가족인 우리에게 큰 부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여름에 한 달간 떠났던 태국 여행에서 예상외의 지출이 생겨 이번엔 항공권을 포함한 전체 예산을 500만 원 정도로 맞춰야 했다. (항공사 마일리지가 있기에 가능한 예산이었지만...)
관련 글 ▶ 한 달쯤, 발리 여행 다녀오겠습니다.
▲ 나의 첫 책, <우리아이 첫 해외여행>의 표지 사진이 된 꾸따비치의 아이들. 찍은 사진을 현지에서 출판사로 보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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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떠났고, 마지막이라는 각오가 있었기에 더 열심히 즐기고 싶었다.
스티브는 비장한 각오로 서핑스쿨에 2주간 등록해 새벽과 오후, 하루 두 번씩 바다에 나가 파도와 싸웠다. (직접 해보니 싸웠다는 표현이 아주 적절하다. 물론 매번 패대기쳐지는 건 그였지만.) 1주는 꾸따비치에서 자세, 패들링, 테이크 오프 등을 배웠고, 2주차에는 스랑안 등 다른 해변으로 이동해 제대로 파도 타는 법을 익혔다. 파도를 타다가 보드에 맞아 병원에 다녀오는 등 속상한 경험도 했으나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다. 나는 그가 마지막 수업을 하는 날 원데이 클래스를 신청해 '체험 서핑' 비슷한 걸 해봤다. 그걸로 충분했다.
서핑은 체력소모가 심하고, 갈비뼈가 매우 아픈 운동이다. 하루만 해도 다음날 온몸이 쑤시는데, 2주를 매일 연달아 하는 건 무리였다.
실제로 2주 코스를 등록한 다른 사람들도 오기로 3~4일을 버티다가 이후에는 중간마다 하루씩 쉰다고 했다. (물론 쉬는 날이라고 강습료를 환불해 주진 않는다.) 도전해 보고 싶다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그래도 한번 일어서 보면 아무리 삭신이 쑤셔도 또 파도를 타보고 싶은 매력이 있다. 스티브는 서핑은 '혼자 하는 취미'라는 얘길 했다. 함께 서핑트립을 떠나도 즐기는 건 개인의 몫이라는 거다. 가족과 함께하기에는 버디와 호흡을 맞추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다이빙이 낫다는 결론이다.
관련 글 ▶ [한 달쯤 발리] 2 일차, 아빠는 서핑 중
지칠 때까지, 물놀이
▲ 가장 아름다운 발리 바다를 볼 수 있었던 비치클럽 핀(Finn) 전용해변
스티브가 서핑 스쿨에 다니는 2주간 아이들과 나는 숙소의 작은 수영장이나 근처 해변에서 원 없이 물놀이를했다. 가끔은 오토바이를 타고 더블식스 비치에서 일몰을 보거나 스미냑이나 멀리 남쪽의 웅아산 지역에 있는 비치클럽까지 가기도 했다.
▲ 물 좋기로 소문난 스미냑의 포테이토 헤드에서 진아와 수영을 즐기며... 낮에는 가족단위 손님도 많다.
발리에는 경치 좋은 해변에 핫한 비치클럽이 많다. 대표적인 곳이 락바, 핀, 싱글핀, 포테이토 헤드 같은 곳. 깨끗한 수영장, 근사한 비치, 그리고 멋진 음악까지 한꺼번에 즐길 수 있어 웨스턴 훈남, 훈녀들이 많이 모인다. 헌팅 상대를 찾는 그들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가족여행객에게도 제격인 조건이라 낮에는 아이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 포테이토 칩이 맛있는 포테이토 헤드. 아무리 가르쳐 줘도 진아는 계속 이곳을 포테이토 칩이라고 불렀다.
비용은 온종일 노는데 인당 2만 원(어른 기준) 정도. 입장료가 아니라 식사와 음료를 이만큼 먹으면 된다. 한국 물가 기준으로 보면 홍대 파스타 집에서 한 끼 식사 할 정도의 비용으로 럭셔리한 발리의 비치바를 경험할 수 있다. 게다가 음식도 꽤 맛있다. 하지만 모든 곳에 장점만 있을 수는 없는 법. 가끔 느꼈던 인종차별, 그리고 내가 쓰는 돈이 발리의 관광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호주인 자본가의 주머니로 들어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우울해질 때도 있었다.
▲ 해가 기울 수록 무르익어가는 디제잉을 들으며, 썬베드에 누워 맥주를 홀짝일 수 있다는 건 이 비치클럽의 가장 큰 장점~!
▲ 숯불에 구워 달콤한 땅콩 소스를 곁들여 낸 사떼
아이들과 발리 여행을 준비하며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먹거리'였다. 진아는 입이 짧은 아이라 평소에도 음식을 잘 먹지 않는데, 가뜩이나 김치를 고집하는 이 녀석이 여행 중 식욕이 더 떨어지면 어쩌나 고민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숙소도 주방이 있는 레지던스로 잡고, 체면 불고하고 진공 팩에 김장김치 한 포기를 통으로 포장했다. 과자를 먹지 않는 아이를 위해 고구마도 직접 말려 간식으로 준비했다. 가방 무게를 줄이기 위해 내 옷을 뺄지언정 아이가 마실 한약은 몽땅 가져갔다. '이제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어글리 아줌마인가?'라는 자괴감이 들었지만, 아이를 놓고 가지 않으려면 챙겨야 했다.
▲ 한 달간 발리에서 먹은 음식 중 일부, 화려한 것 중심으로. ㅎ
그런데, 막상 떠나와 보니 이 아이는 발리 음식을 너무(!) 잘 먹는 게 아닌가? --; 꾸준히 먹었던 한약이 발리에서 약효를 발휘했는지, 아니면 발리 음식이 입에 맞았던 건지 모르겠지만, 진아는 향이 강한 인도네시아 음식도 곧잘 먹었다. 그중 밥과 반찬을 한 그릇에 올려놓고 손으로 뭉쳐 먹는 나시 짬뿌르를 가장 좋아했다. 정균이도 달콤한 땅콩소스가 버무려진 사떼를 손에서 놓을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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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10년치, 비치웨어 쇼핑
▲ 발리 로컬 브랜드, 서퍼 걸. 여자라면 혹할만한 비치웨어 편집숍.
아이와 함께 발리를 찾은 것은 처음이지만, 나는 발리 여행이 벌써 네 번째다. 매번 일주일, 길어야 보름 남짓한 기간으로 여행을 떠났기에 이곳 전부를 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제 발리에서 사야 할 것은 폴로 셔츠가 아니라, 다시 발리 여행을 떠날 때까지 입어야 할 서핑팬츠인 것쯤은 안다.
▲ 퀵실버나 록시 외에 꾸따 라인 같은 저렴하고 괜찮은 발리 로컬 브랜드도 많다.
서핑하기 좋은 비치는 다른 곳에도 많고, 물가 저렴한 것으로 따지면 필리핀이나 태국도 있는데 왜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비치웨어를 사야 하냐고? 그건 처음에 얘기한 '서핑을 배우기 좋은 곳 중 가장 저렴한 곳이 발리'라는 이야기와 맥을 같이 한다. 서퍼들이 많으니 당연 서핑용품이나 서핑팬츠, 래시가드, 수영복 등을 파는 비치웨어 숍이 많다.
▲ 서퍼들의 꿀잼이라는 서핑용품 아웃렛 쇼핑
바다 물놀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퀵실버, 록시, 빌라봉, 헐리, 립컬 등 브랜드의 최신 제품 뿐 아니라, 이월상품을 모아 파는 아웃렛도 즐비하다. 한국에서는 구하기도 어렵고 비싼 네오플램 소재의 웻수트도 두께별, 종류별로 있다. 이러니... 발리 여행에서는 비치웨어를 쟁일 수밖에~!
잘란잘란 근교 여행지 산책
▲ 울루와뚜의 숨 막히게 아름다운 절벽
여행 막바지에는 차를 대절해 관광 필수 코스인 울루와뚜와 우붓을 다녀왔다. 이 두 곳은 발리 여행을 갈 때마다 들르는 곳이어서 이번에는 좀 스킵하고 싶었으나 아이들에게 발리니스의 전통과 종교를 조금이나마 체험하게 해주고 싶어 나섰다.
▲ 선셋을 배경으로 재밌는 게짝 댄스
우리가 울루와뚜를 찾았던 날은 보름으로, 풀문 세러머니가 있는 날이었다. 한 달간 레지던스에 머물며 친구가 된 운전기사 악바르에게 설명을 들으며 사원에서 종교의식과 게짝 댄스를 관람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이들은 우리보다 악바르를 더 따랐고, 덕분에 스티브와 나는 10년 전 이곳에서의 추억을 회상하며 감상에 젖을 수 있었다.
▲ 짜낭사리를 만든 후, 진아
우붓에서는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짜낭사리 만들기 클래스에 참여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길에서 흔하게 봤던 작은 소쿠리의 정체를 늘 궁금하게 여겼던 진아는 정말 눈빛을 반짝이며 재미있어했다. 이번 체험을 계기로 아이가 발리와 이곳 문화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기를 바라본다.
일상 여행자로서의 삶
▲ 어느 평범한 오후, 편의점
어떤 곳에서 '한 달을 묵어본다'는 것은 여행자가 아닌 '생활자'로서의 삶을 경험해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장기여행을 동경하는 이유도, 조금 더 느긋하게 여행지를 즐기고 그곳에 동화돼 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 숙소 근처 시장에서 김밥재료를 사는 중
실제로 한 달간 한 곳에 머무르며 현지인 흉내를 내다 보면 관광지로서의 지역이 아닌, 삶의 터전으로서의 마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사는 방법이 조금 달라도 결국 우리와 비슷함을 느끼고, 그러면서 여기도 다 아이 키우고 사람 사는 곳임을 깨닫게 된다.
▲ 이 조그만 스쿠터에 네 식구가 타고 다녔다.
물론 좋은 면만 보이는 건 아니다. 아무리 한 달을 살아도 떠날 수 밖에 없는 이방인이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래 머물며 규칙에 익숙해 질수록,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록, 더 깊이 알 수 있다.
▲ 비 개인 아침에 잠옷 바람으로 잘란잘란 동네 산책
스티브는 일주일만 서핑을 하고, 다이빙 포인트가 있는 발리 동부로 갈 걸 그랬다며 후회했다.
나도 그가 우리와 시간을 더 보낼 수 있었더라면, 결혼 10주년을 기념해 신혼여행으로 떠났던 길리 뜨라왕안도 가볼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긴 한다. 가끔은 발리까지 와서 매일 비슷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 아깝기도 했다.
그래도 돌이켜보니 우리 집과 우리 오토바이, 그리고 매일 드나들던 단골 가게가 있었던 발리 여행은 함께 했던 그 어떤 해외여행보다도 가장 마음 편했던 여행이었다. 이제 통장 잔고는 바닥을 드러냈지만 현업으로 복귀해 고군분투 중인 스티브와 취학을 앞둔 큰 아이, 누나 없이 어린이집에 다녀야 하는 작은 아이에게도 이번 여행이 그을린 피부색만큼 진한 행복으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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