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맞이 달콤여행, 대만 타이중 4박 5일 스케치

단둘이 떠나본 게 얼마 만인가? 


두 아이의 부모로, 며느리와 사위로, 조직의 구성원으로, 우리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무엇으로만 살기 시작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아침에만 얼굴을 마주치는 사이, 어쩌다 잠깐 시간이 나도 각자의 세계에서 시간을 보내고, 아이 외에는 할 이야기가 없는 관계.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딱히 위안이 되지 않는다.


그와 나는 가족이기 이전에 오랜 연인이었고, 마음을 나누는 절친이었며, 서로의 꿈을 응원하는 지지자였다.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하기 위해 누군가의 무엇이 아닌 누군가가 되어보기로, 여느 해와는 다른 2014년을 계획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첫 실행은 둘만의 여행이었다.



새해맞이 데이트, 4박 5일 타이중 여행 스케치



사실 타이완은, 특히 타이중은 내게 딱히 흥미로운 곳은 아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타이베이와 지우펀이 전부인 줄 알았던 나라, 꽃보다 할배의 영향으로 갑자기 인기를 끌게 된 여행지,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버블티의 원산지, 그나마 끌리는 건 볼만한 야시장이 있다는 정도? 


그러나 실제 여행을 떠나보니 타이완, 타이중은 그 자체로 4박 5일을 투자해도 모자랄 만큼 매력적인 여행지였다.

가이드북 뿐 아니라 인터넷에도 소개된 정보가 없어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찾아내는 재미가 있었던 곳~!

다닐수록 보고 싶은 곳이 많아지는 타이중으로의 4박 5일 여행, 지금부터 소개해 볼까 한다.



Day 1. 타이중으로 (인천 - 타이중 공항 - 궁원안과)



오전 11시 비행기를 타고 타이중 공항에 내린 시각은 2시 즈음. 숙소에 짐을 풀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궁원안과(宮原眼科)였다.

옛 안과 건물을 리모델링해 과자점을 만든 궁원안과, 천정이 높은 실내는 유럽의 도서관을 옮겨놓은 듯 멋스러운 책장이 가득 차 있고 그 안에는 대만 특산품인 펑리수(鳳梨酥, 파인애플 과자)와 초콜릿, 차 등이 진열되어 있다.



궁원안과를 들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찾는 필수코스 '일출(日出)' 아이스크림 전문점.

아이스크림도 맛있지만, 토핑으로 펑리수와 치즈 케이크 등을 얹어 먹을 수 있어 인기가 좋다.



Day 2. 타이중 시내여행 (타이중 공원 - 일중가 - 보각사 - 타이중 국립미술관 - 타이중 야구장)


여행 중이기도 하고, 날씨가 춥지 않으니 2013년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던 12월 31일.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이국에서 맞는 마지막 날이자 특별한 새해이니 카운트 다운 행사에 참여해보기로 했다. 오전에는 아직 결정하지 않은 내일과 모레 일정을 세우느라 난토우((南投)행 버스 터미널에서 시간을 보내고,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일중가(一中街, 이중지에)로 이동해 근처의 신년맞이 행사장소를 확인하고 타이중 공원에 들를 수 있었다.


타이중의 상징이기도 한 타이중 공원은 그 명성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웨딩촬영을 나선 커플의 뒤를 쫓으며 잠시 옛 추억에 젖어보기도 했다.



무려 28m가 넘는 대형 미륵불이 있는 보각사(寶覺寺, 바오줴사)에서는 점괘를 뽑아보며 한 해를 점쳐봤다.

재미로 보는 점괘이지만 평탄한 한 해가 될 것이라니 왠지 안심. 숙소 근처에 있는 타이중 국립미술관(國立美術館)을 한바퀴 둘러보고 자정에 있을 새해 카운트 다운을 위해 잠시 휴식을 취했다.



밤에 다시 찾은 일중가 야시장은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해야 했지만,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들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연말이라고 흥청대기보다는 연인, 가족과 함께 따뜻한 차를 마시며 새해를 맞이하는 그들의 건전함에 잠시 숙연해지기도 했다.



인파를 뚫고 우리가 찾은 곳은 타이중 야구장(台中棒球場).

10시가 넘은 시각이었고, 6만 명 정도의 사람이 모였는데도 운 좋게 가장 뷰가 좋은 곳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한 시간 번 2013년, 이국에서 맞는 새해 첫날, 그리고 새로운 시작.

新年快樂(신녠콰이러)~!



Day 3. 타이중 근교여행, 일월담



난토우행 시외버스 타고 굽이굽이 일월담(日月潭, 르웨탄) 가는 길. 시내에서 30분만 나가면 영화 '라기 공원'에나 나올법한 울창한 삼림이 나타난다. 고속도로가 무려 20m 상공의 고가라는 건 좀 무서웠지만 덕분에 대만 중부의 아름다운 산맥을 한눈에 내려다보해와 달을 닮은 에메랄드 빛 호수, 르웨탄에 도착했다. 



우리가 끊은 NT$680 티켓에는 타이중-일월담 왕복 버스 티켓과 일월담 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보트, 버스, 로프웨이 승선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월담 인포메이션 데스크에서는 해당 티켓으로 다닐 수 있는 최적의 코스를 제안해 주기도 했다.


다양한 곳에서 아름다운 호수의 사진을 담아봤으나 내가 뽑은 일월담의 베스트 스팟은 단연 로프웨이 안~!

오랜만에 남편과 손잡고 호수 둘레의 고즈넉한 트레일을 걸으며 곳곳에 숨은 절과 비경을 찾아다니는 것도 좋았다.


해와 달의 호수, 그래서인지 더욱 잊을 수 없는 르웨탄의 일몰.



Day 4. 타이중 예술 탐방 (타이중역 - 20호 창고 - 타이중 문화창의산업공원 - 시장관저 - 정명일가 - 봉갑야시장)


우리와 비슷하게 일제 강점의 역사가 있는 타이완, 특히 타이중에는 당시 지어진 건물을 그대로 활용하는 곳이 많다.
과자점으로 리모델링 한 궁원안과, 음식점으로 활용하고 있는 옛 시장관사, 옛 모습 그대로 여전히 기차역인 타이중역.

아픈 흔적이지만 여행자에게는 자체가 세계사의 흔적이자 멋스러운 볼거리이다.



타이중역 뒤편에는 옛 기차 창고를 고쳐 만든 미술관, 20호창고(20號倉庫)가 있다.
20~26호 창고를 모두 미술관이나 작가의 공방, 작업실로 활용하고 있는데 좁은 골목을 누비며 예술가의 작업실을 훔쳐보는 재미가 있었다.


20호 창고에서 10분 남짓 걸으면 오래전 와인과 곡주를 빚던 술 공장을 개조해 만든 미술관, 타이중 문화창의 산업공원(台中文化創意產業園區)이 나온다. 중국 베이징의 798 예술구를 연상케 하는 풍경이나 규모가 좀 작은 편이다.




미술관인 줄 알고 찾아간 곳에서 우연히 만난 주류박물관을 만났다. 애주가 부부가 이런 기회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타이완 술의 역사를 진지하게 공부하고는 고량주 테이스팅까지 했다. 이번 타이중 여행 일정 중 가장 재미있게 보낸 곳이 아니었나 싶다.


여행은 발견의 연속이라고 했던가, 사실 이 날은 타이중 근교의 자연 휴양림인 '시토우'에 가기로 했던 날이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시작된 며칠간의 강행군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아 당일 아침에 일정을 급변경했다.


시내 구경이나 천천히 해보자며 관광안내센터에서 집어든 '타이중 버스여행' 책을 보다가 '20호 창고'와 '타이중 문화창의산업공원'을 발견했다. 미술관에 가기 전까지 절대 몰랐던 주류 박물관에서는 뜻하지 않은 고량주 테이스팅도 했다.

그리고 여기, 왜정시대의 타이중 시장관저(官邸花園餐廳)라고 스쳐봤던 곳이 레스토랑이라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며칠 전부터 훠궈가 먹고 싶던 나는 이 분위기 좋은 곳에서 정말 맛있는 관저식 핫팟(hot pot)을 맛볼 수 있었다.

남편이 주문한 한국식 핫팟에는 얼큰한 김치도 들어있어 며칠간 느끼했던 속이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타이완에는 워낙 버블티를 파는 곳이 많아 스킵할까 하다가 그래도 원조라니 궁금해 들른 정명일가(精明一街) 춘수당(春水堂).

평일 라지사이즈 15% 할인이란 말에 배가 부름에도 빅사이즈로 주문한 우리는 알뜰 여행자?!


일중가의 야시장을 다녀와서 그런지, 아니면 평일이라 그런지 타이완에서 가장 큰 야시장이라는 봉갑야시장(逢甲夜市, 펑지아 야시장)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Day 5. 타이중 - 인천



2시 비행기, 현실로의 쉬프트를 2시간 앞두고...
지난 며칠간 잊고 지내던 고민과 해야할 일에 대한 부담이 한꺼번에 무거운 압박으로 다가오는 시간,
아마 이때가 여행중 가장 괴로운 순간이 아닐까 싶다.


지난 4박 5일을 돌아보니 타이중이라는 도시는 대만 중심의 산업 거점지로서 현재와 과거(일제 강점기)의 모습이 공존하는 흥미로운 곳이었다.
대만 중부 여행의 시작점
이기도 해 르웨탄(일월담), 시토우, 아리산, 타이루거 등의 유명 관광지도 모두 타이중에서 준비해 다녀올 수 있었다.

치안도 좋고 여행 인프라도 잘 구축되어 있어 관광안내센터에서 주는 지도와 가이드북, 버스 앱만 가지고도 대중교통으로 어디든 다닐 수 있었다

게다가 버스카드를 이용하면 반경 8Km이내는 공짜~! 교통비가 들지 않는다는 건 여행지로서 정말 매력적인 요건이다.


같은 중국어를 쓰지만 중국과 타이완 사람들은 정말 다르다. 지방 도시인 타이중 사람들도 어찌나 친절하고 영어를 잘하는지~

난 우스갯 소리로 '중국인의 얼굴, 일본인의 속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덕분에 중국어 한마디 못하는 나도 어렵지 않게 여행할 수 있었다. 

겨울인 요즘의 타이중은 딱 여행하기 좋은 15~20도의 선선한 날씨,

버블티와 길거리 음식들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든든하게 내 곁을 지켜준 남편과 함께 5년만에 단둘이 떠난 여행이라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바쁘다는 이유로, 손이 많이 가는 아이들을 챙겨야 한다는 이유로 꽤 오랜동안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소홀했던 시간,

손바닥에 땀나도록 열심히 손을 잡고 여행했으니, 이제 우리는 더 단단한 믿음으로 오래 사랑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여행하는 동안 아이들이 많이 보고싶긴 했다.
5일이라는 긴 시간동안 천방지축 두 아이를 돌봐주신 시가 어르신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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