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버스에서 만난 인연, 터키 여대생과의 추억

야간버스를 타고 파묵칼레(Pamukkeale)로 향하는 길. 카파도키아에서 하루를 더 지체하는 바람에 블루라군이 있는 페티예를 포기하고 바로 파묵칼레로 이동하기로 했다. 저녁 8시 반에 출발했으니 앞으로 10시간은 꼬박 밤을 새워 달려야 한다. 배정받은 복도 측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대부분 승객이 남자다. 차는 거의 만석인데, 내 옆자리에만 좌석이 비어 있었다. 

혼자 여행의 즐거움이자 두려움 중 하나는 옆자리에 앉을 짝꿍을 기다리는 거다. 특히 오랜 시간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경우 비행기나 버스의 옆자리에 생각이 통하는 말벗이라도 앉으면 그 자체가 하나의 추억으로 남는다. 또래 동성이 앉기를 기대하기도 하고, 은근 멋진 이성과의 로맨스를 꿈꾸기도 한다. 반대로 암내 나는 외국인이라도 앉으면 그때부터 상상만 해도 괴로운 고행길의 시작이다. (아마 그들도 마늘냄새와 젓갈 비린내가 진동하는 우리가 반갑진 않겠지..;)

온갖 상상을 하다 보니 벌써 출발시각이 다 되었다. 기사가 차에 시동을 걸고, 승무원은 좌석 체크를 하기 시작한다. 차라리 아무도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젊은 여자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온다. 반대편에 앉은 여자들에게 인사를 한 후 내 옆자리로 들어오는 그녀.

나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또래로 보이는 건너편의 여자들과의 호들갑스런 대화가 이어졌다. OTL. 터키의 버스가 아무리 비행기보다 좋다지만 (관련 글: 훈훈한 남자 승무원이 있는 터키의 고속버스 들여다보기) 밤새 이렇게 간다면 한잠도 잘 수 없을 것 같다. 파묵칼레에서는 무박 2일의 고된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 버스에서 밤을 보내면 내일은 종일 파묵칼레에 있는 유적들을 돌아보고 다시 버스로 4시간 거리인 셀축으로 이동해야 하기에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 

"자리를 바꾸면 어떨까?"
 
최대한 상냥한 표정과 목소리 옆자리에 앉은 여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친구들. 머쓱한지 괜찮다고 하더니 침묵에 빠져든다. ㅠㅠ;

이 불편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의자 밑으로 계속 부스럭부스럭 가방을 뒤지던 여자가 비닐봉지 하나를 꺼내 나에게 건넨다. (사실 난 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무척 거슬렸다.)

봉지에 들어 있는 것은 버터 향 가득한 과자였다. 갓 구운 듯 따뜻하고 촉촉한 촉감에 맛은 담백한 것이 스콘과 비슷했다. 뻣뻣한 나와는 달리 어려 보여도 이 친구가 한 수 위였다. 과자를 매개로 'Where Are You From?'으로 시작되는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알고 보니 이들은 파묵칼레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파릇파릇한 대학생들이었다. 모두 21살로 동갑내기로 나와는 무려 띠동갑이 넘게 어린 아이들이었단. 베르나(Berna Yigcel)라고 자신을 소개한 짝꿍은 방학을 맞아 친구들과 함께 카파도키아에 사는 사촌의 집에 다녀가는 길이라고 했다. 도자기로 유명한 아바노스에서 도자기 체험도 하고, 카파도키아 트래킹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친구들보다 버스를 늦게 탄 건 숙모가 싸주는 간식을 기다리다가 그랬단다. 밤차를 타고 10시간을 달려 파묵칼레로 떠나는 조카가 아쉬운 숙모는 저녁 내내 차 안에서 먹을 간식거리를 준비했다고 한다. 차마 그 정성을 거절할 수 없어 우선 친구들을 차에 먼저 태우고, 자신은 간식을 받아 헐레벌떡 뛰어왔다고 한다. 가방을 열어 보여주는데 뵈렉과 헬바 등 각종 빵과 과자가 한가득이다.

정 많은 터키 사람들. 베르나는 잠을 청하려는 나에게 자꾸만 먹을 것을 권한다. 영어로 얘기하는 것 자체가 재밌는지, 아님 낯선 동양인이 신기한지 우리는 밤이 늦도록 사는 얘기, 남자친구 얘기, 아이 얘기를 나눴다.

완전 안습인 사진이지만 이런저런 대화 끝에 친해진 파묵칼레 여대생들과 찍은 사진이라 정겨워서 올려본다.

그래... 하루쯤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겠지. 파묵칼레를 샅샅이 돌아보는 것보다 어쩌면 이들과의 추억이 더 오래 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스름한 새벽이 돼서야 도착한 파묵칼레. 헤어짐이 아쉬운 우리는 서로의 소지품을 한가지씩 교환했다. 그녀는 지중해 어디쯤에서 샀다는 조개 목걸이를, 나는 고민 끝에 천 원짜리 한국 지폐를 선물했다.

베르나는 지폐를 한참 들여다 보더니 천원에 그려진 이황도 아타튀르크 같은 대통령이냐고 물었다. 모든 지폐에 '아타튀르크'가 새겨진 터키의 화폐와는 달리 지폐마다 다른 인물이 있는 우리의 화폐가 아마 신기했나 보다. 한국엔 지폐에 그릴만큼 존경할만한 인물이 많다며 자랑삼아 얘기하던 나는 이황이 어떤 인물인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말문이 막혔다. 진땀을 흘리며 생각나는 것만 몇 가지 얘기하고 말았는데, 돌이켜보니 참 창피하다.

여행을 하면서 항상 느끼는 건데, 한국에 대해 좀더 공부해야 겠다. 적어도 외국인에게 소개할 수 있는 내 나라의 자랑거리와 간단한 역사, 수치적인 데이터 몇개 쯤은 알아둬야 하지 않을까...

밤을 새워 도착한 파묵칼레, 곧 비가 쏟아질것 같은 흐린 날이었지만 듣던대로 파묵칼레의 석회 호수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여행 Tip] 파묵칼레 가는 길

파묵칼레는 터키 남서부 데니즐리 주에 있다. 다른 지역에서 이동시에는 고속버스 이용이 보편적이며, 모든 고속버스는 데니즐리 오토가르에서 정차한다. 데니즐리 오토가르에서 차로 30분 거리인 파묵칼레까지는 오토가르에 대기 중인 미니버스를 타야 한다. 한가지 알아둬야 할 점은 이 미니버스는 고속버스 회사에서 운영하는 세르비스(서비스 버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파묵칼레의 호텔, 여행사 등에서 운영하는 버스인데, 서비스 버스로 속여 관광객들을 태운 후 자신이 운영하는 호텔에 묵게 하거나 여행상품을 계약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썩 내키진 않지만 무료 버스이니 그냥 타자. 모른 척 버스에 타고 파묵칼레에 내려서 제 갈길을 가면 된다. 뒤통수가 따갑겠지만 어차피 먼저 속인것은 그들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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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일기를 바탕으로 생각 날 때마다 띄엄띄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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